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둠을 밝히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빛 중에서 어둠에 배타적이지 않고 어둠을 껴안으면서 스스로 영롱해지는 것은 유일하게 촛불이다....... 촛불은 동화된다. 강렬한 빛으로 어둠을 제압하려 하지 않는다. 어둠을 자신 속으로 스미게 하여 그 힘으로 꽃을 피운다.”(55쪽)


어둠을 껴안아....... 자신 속으로 스미게 하여 그 힘으로 꽃을 피운다는 표현과 마주했을 때, 내가 먼저 떠올린 건 사실, 유년시절의 호롱불이었다. 강원도 깊은 산골 칠흑의 어둠 속에서 호롱불은 최대한 빛을 내려 한다기보다 최소한, 그러니까 어둠이 열어주는 틈새까지만 발맘발맘 다가가는 순박한 빛이었다. 그러기에 호롱불 아래 앉아 있노라면 어느새 코끝에 어둠 요정이 달라붙곤 했던 것이다.


호롱불은 자신의 빛이 어둠과 적대적 모순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모르는 듯하다. 하기는 그 모순이라는 게 인간의 생각이고 개념이지 호롱불에게야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 아니랴. 그러니 호롱불은 자신의 빛으로 어둠을 물리친다고 느끼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다. 만일 그랬다면 자신 곁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랑 바느질하는 엄마들이랑 모두 멀찌감치 보내 어둠을 막아서도록 했을 것이다.


1965년 가을 서울에 올라온 강원도 산골아이가 가장 놀란 것은 낮의 자동차, 밤의 전깃불이었다.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이 두 물질은 해끔하고 쌀쌀맞은 서울아이들보다 한 발 먼저 산골아이의 기를 꺾어 버렸다. 운전 경력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자동차 운전과 주차를 잘 못한다. 하다못해 전자기기 시그널의 작은 빛조차 꼼꼼히 단속하지 않으면 지금도 그는 잠들지 못한다. 운전이야 않으면 그만이지만 불면증, 참 야속한 거다.


산골아이가 호롱불 대신 도시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촛불이었다. 개집보다는 넓지만 결코 사람 운신할 공간이 못 되는 비좁은 다락방에 올라가 촛불을 켜고 보스락거리다가 별스럽단 소리 들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정전이 자주 되던 시절, 그 때마다 켤 수밖에 없었던 촛불의 아늑함은 마치 산골 집 호롱불 느낌과 같았다. 정전을 핑계로 숙제 멈추고 빛과 어둠의 가장자리에 고즈넉이 눕는 시간은 참으로 감미로운 것이었다.


촛불은 무욕하다. 몽상과 기도와 응시의 힘으로 자신의 양식을 만드는 촛불 아래서, 그 나직한 들숨과 날숨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나는 부끄러워진다. 자신을 태우면서 마침내 무소유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이 가난한 자의 정결한 혼. 촛불 밑에선 누구나 시인이 된다.”(60쪽)


물론 그 시절, 그 촛불에서 무욕의 체취나 마음이 가난한 자의 정결한 혼향(魂香)을 맡을 수는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어수룩한 인생경영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무욕, 무소유인 상태가 되었을 뿐이니 오히려 부끄러울 따름이다. 내가 촛불에서 정결한 혼을 본 것은 나이 오십이 넘어서였다. 어찌 보면 매우 뜻밖이랄 수 있는 기회였다. 지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촛불집회, 거기였다.


나는 그 촛불 속에서 무욕의 바다를 보았다. 마음이 가난한 자의 정결한 혼, 그 신령한 불을 보았다. 즐거운 몽상, 간절한 기도, 해맑은 응시를 보았다. 중학생인 내 딸에게, 그 아이 손잡은 내게, 물대포 맞으며 “온수!”를 연호하는 시민에게 무슨 탐욕이 있었을 것인가. 수많은 날들 거대하게 너울거리던 촛불, 그것은 다만 촛불이 아니었다. 어둠을 자신 속으로 스미게 하여 그 힘으로 촛불이 피워낸 꽃이다. 캔들 플라워다!


자기 의사를 드러내는 데 촛불을 드는 행위만큼 배타적이지 않고 상대를 껴안아 자신 속으로 스미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권력자는 빨갱이 운운하며 배후를 밝히라고 호통 쳤다지만 나는 심히 부끄러운 마음으로 딸아이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내 부끄러움은 필경 김선우의 그것, “....... 촛불 아래서, 그 나직한 들숨과 날숨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나는 부끄러워진다.”는 그 부끄러움과 본질상 같을 터이다.


무욕한, 마음이 가난한, 촛불 아래서 부끄러움을 아는 자의 발걸음은 “발꿈치를 살짝 들고 땅과 공기의 중간쯤을 걷는 듯한. 현실에 있되 현실 조금 위쪽을 꿈꾸는 듯한 걸음걸이”(김선우「캔들 플라워」368쪽)다. 그 걸음걸이 자체가 몽상이며 기도며 응시다. 즐겁고도 간절하며, 간절하면서도 해맑은 놀이가 아니면 모순을 흔쾌히 받아 안아 세상 바꾸는 꽃으로 피워낼 다른 무엇이 있으랴. 촛불은,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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