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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김선우보다 열서너 해 앞, 아마도 그가 태어나 자란 곳 그 너머쯤, 강원도 오대산 줄기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 시절 그런 산골 마을에 의자 달린 책상을 가진 아이는 전혀 없었다. 대부분 방바닥에 엎드려 하거나 밥상을 펴놓고 했다. 조금 나은 형편이면 앉은뱅이책상 있을 정도. 나 또한 그랬고 그렇게 공부하던 기본자세는 그 뒤로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에 한의학 공부하겠다고 수능시험 준비를 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공부하던 곳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작은 암자였다. 그리 들어간 까닭은 수학 때문이었다. 스무 해도 훨씬 지나 다시 시작한 고교 과정 수학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백 점 만점에 팔십 점을 못 넘기자 나는 수학책만 열한 권을 싸들고 법대생 시절 사시 준비할 때도 가지 않았던 절로 향했다.
이 무렵엔 다른 과목 다 만점 맞고도 수학 팔십 점 맞으면 한의대를 갈 수 없었다. 하루 열다섯 시간 이상 수학공부만 하기 시작했다. 수도승과 다름이 없었다. 허나 그 수행(!)도 허사. 수능시험과 같은 조건으로 모의시험을 치면 늘 막히던 문제에 다시 막힌다. 막히면 불같이 화가 난다. 화난 채 풀면 점수는 오르지 않는다. 점수가 꼼짝 않고 똬리 튼 현실을 목도할 때 남는 건 절망뿐.
바로 이즈음, 우연히, 앉은뱅이책상에서 공부하는 것이 의자 위에 앉아 공부하는 것보다 1.5배가량 체력소모가 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뜩이나 힘든 판에 그토록 체력까지 더 소모해가며 공부하면 안 되겠다 싶어 그 동안 정들었던(!) 앉은뱅이책상을 떠나 전격, 의자 위로 자리를 옮겼다. 이 공간이동, 자세이동이 어떤 예측 불가능한 자유를 몰고 온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의자의 받침 면과 다리가 만드는 ‘벌어져 있는 공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예측하기는 어렵다.......”(33쪽)
“.......의자에 앉아 있는 순간의 인체를 생각해보라. 가부좌를 틀고 바닥에 앉아 있을 때 우리의 몸은 흔히 질서와 지혜를 향해있다.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우리의 몸은 ‘앉아 있다’는 측면에서 정적이지만, 정적인 고요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전자보다 훨씬 자유분방하게 움직인다.......”(34쪽)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모의시험을 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중후반부 어느 문제에서 막힌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직으로 화가 솟구친다. 그런데! 바로 다음 찰나, 굵고 나지막한 한 음성이 들린다. “너, 왜 화를 내는 거냐?” 온 몸에 소름이 확 끼친다. 재빨리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있을 리 없다. 아, 내면의 소리로구나! 즉각, 연필을 내려놓는다. 가만히 물어본다.
“왜 화가 날까?” 답이 곧 나온다. “반드시 풀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가만히 물어본다. “왜 반드시 풀어야만 한다고 생각할까?” 답이 곧 나온다. “내가 지금, 사십 넘긴 나를, 이십 여 년 전 공부 잘 해 이름 날리던 열아홉 살짜리 그 소년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딩동댕! 과거의 어떤 기억, 그 기억으로 고정된 자아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경직성, 그게 답이었다.
현실을 현실로 해방하자 자유가 들이닥친다. 자유는 분노를 해체한다. 더 이상 화가 나지 않는다. 그게 변화의 진면목이 아니다. 화가 나지 않자 막혔던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 기적이다. 기적이 아니다. 정확무비하게 이치를 따른 것이다. 이치를 따르지 못하던 상태에서 이치를 따르는 상태로 변화한 것은 “‘벌어져 있는 공간’ 속에서”였다. 벌어져 있는 공간은 경계의 틈이다. 경계의 틈에서 꽃이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