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김선우는 불교 경전에 나오는 말리카 왕비 부부 이야기 끝에 붓다의 게송 한 편을 인용하고 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나보다 기꺼운 것은 없도다.

그토록 소중한 것 남 또한 그럴지니

제 자신을 아끼는 이

남 해하지 않으리.”(28쪽)


이 게송은 프리모 레비의 시 <게달레 대장>의 후렴 연과 조우한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유대인인 프리모 레비는 현자(랍비) 전승에 정통했음에 틀림없다. 사실 이 부분은 유대 전승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현자 힐렐의 어록을 변용한 것이다. 힐렐의 세 문장은 이렇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하는가?

내가 내 자신만을 위한다면 내가 무엇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가?


인간의 삶을 요약하면 사실, 딱 이뿐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자기 삶이니 자기가 살아내야만 한다. 이 사실은 내게 그런 만큼 남에게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나의 삶을 사는 사람은 남의 삶도 꼭 그만큼 소중히 한다.


붓다의 게송은 나중에 한자어로 이렇게 압축된다.


자리이타(自利利他)!


그렇다. 바로 대승불교가 그리 하였다. 붓다의 가르침이 인도를 넘어 동아시아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압축언어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힐렐의 세 의문문은 나중에 단 하나의 명령문으로 압축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렇다. 바로 예수가 그리 하였다. 힐렐의 가르침이 유대민족을 넘어 유럽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압축언어 덕분이다.


두 말은 정확히 그 뜻이 같다. 물론 통속 대승불교와 통속 기독교 모두 이 말을 사실상 곡해함으로써 사회적 실천 문제에서 실패했고, 실패하고 있다는 것 또한 같다. 자기 위상과 사명을 과도하게 의식한 나머지 이타(利他), 이웃사랑의 망상에 빠져 자기 사랑, 자기 신뢰를 등한히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기기만은 물론 사회 전체를 기만하기에 이르렀다.


생각해보라. 지금 통속 대승불교와 통속 기독교가 우리사회에서 과연 무엇인가? 두 종교의 교인- 각기 주장하는 대로 통계를 낸 숫자-을 합하면 대한민국 국민 숫자를 넘어선다. 이타(利他),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종교인으로 차고 넘치는 이 나라의 현실은 과연 어떤가? 참으로 가소로운 노릇이 아닌가.


그러면 어찌 하여 이런 참담한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자리(自利)”와 “네 몸과 같이”란 말이 품고 있는 치명성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일이 대체 무엇이며, 또 얼마만한 일인가, 하는 문제를 건너뛰고 어설프게 큰 수레의 자비와 십자가의 영성을 선취했기 때문이다. 색(色)을 모른 채 공(空)을, 에로스를 모른 채 아가페를 뇌까렸기 때문이다.


갈 데 없는 과대망상이다. 과대망상은 결국 관념의 장난일 뿐이다. 이 관념의 장난이 은폐한 물적 현실은 어떠한가. 승려가 호텔방에서 포커를 치고, 목사가 알바 고용해 불법선거운동을 한다. 해탈과 돈 사이, 천국과 권력 사이, 과연 무엇이 똬리 틀고 있는 것인가. 바로, 지금, 불자와 기독자는 김선우의 이 담담한, 그러나 준열한 말을 영혼에 새기라.


자신에 대한 사랑은 거의 언제나 자신에 대한 질문을 포함하며 자신에 대한 질문은 거의 언제나 자신과의 싸움을 포함한다.”(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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