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숟가락이 불러 일으키는 향수는 흔히 세상의 어미들에 대한 그리움을 동반하는데, 아마도 '둥긂'과 '먹인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들은 먹이는 일에 열렬하다. 밥 먹는 아이들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어머니들의 풍경은 지상에서 가장 흔하고 가장 아름답고 또 조금은 슬픈 듯해 보이는 풍경이다.

 

먹는다는 일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살아 있기를 희망하는 존재들에게필연적으로 부과되는 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존재의 치명적인 약한 고리이며 그리하여 먹는 일과 먹이는 일은 도덕적, 미학적 가치 부여 이전에 그 행위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진다."(17쪽)

 

읽고 또 읽어도 그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문득 프리모 레비 한 대목이 포개져 온다.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이것이 인간인가> 15쪽) 

 

아우슈비츠 마지막 끼니를 먹이는 유태인 어머니와 한사코 숟가락으로 감자 껍질을 벗기는 김선우의 어머니는 영원히 같은 어머니다. "그 행위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지는" 먹임의 어머니.......

 

김선우에게 이런 어머니가 계셨기에 그 사랑과 그리움을 달여내어 저 탱맑은 김선우 문학을 이루었으리라. 이 점에서도 김선우는 신께서 편애한 생명임에 틀림없다. 내게 숟가락,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아홉 살 어느 날 아침, 계모가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면서 숟가락 모를 세워 머리통을 찍었던 일이다. 그 다음부터 '내가 대체 밥을 얼마나 많이 먹나' 숟가락질 수를 세는 습관이 한 동안 계속되었다.

 

기쁜 눈물 번지게 하는 김선우의 숟가락은 그에게 문학적 상상력을 수북수북 담아 떠먹이는 오목한 힘이 되었다. 슬픈 눈물 번지게 하는 내 숟가락은, 아마도 내게 의학적 치유력을 다독다독 부추기 볼록한 힘이 되었을 터이다. 이 볼록한 힘은 매 순간마다 내 슬픔을 일깨운다. 슬픔이 일깨워져야 내게 마음을 맡긴 사람의픔에 공감할 수 있겠에 신은 내게 숟가락의 볼록한 진실을 보이신 모양이다.

 

김선우가 신의 편애를 받았다는 말은 오목한 쪽 진실이니 어찌 보면 볼록한 쪽 진실에선 내가 편애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피장파장인가. 아니, 매우 치명적인 한 부분에서 여전히 김선우는 편애 받은 거다. 김선우의 숟가락은 삶을 '놀이'로 오목히 떠먹였다. 그게 문학의 찬란한 결이 되었다. 내 숟가락은 내 삶에서 '놀이'를 볼록히 앗아갔다. 지나친 진지함 '놀이'를 대신했다. 나는 그렇게 의학에 귀의다.  

 

하여 나는 놀이를 잘 모른다. 놀이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경이로움의 감각이 발달하지 못 한 거다. 북콘서트와 강연 자리에서 김선우를 비교적 가까이 본 바, 그는 타고난 놀이 감각을 지녔다. 그의 목소리, 웃음, 몸짓, 그리고 마음짓 모두에 놀이 감각이 다글다글 굴러다닌다. 내가 오직 그런 김선우를 묘사하기 위해 만든 새로운 말이 '탱맑음(膨淸)'이다. 아마도 신은 내 것 모두를 거두어 그에게 주셨을 거다.^^

 

이제, 신과 대좌해야겠다. 내 의학과 치유에 놀이 감각을 되심어달라고 담판 지을 요량이다. 여생이 얼마일지 모르지만 지금부터 노는 의학, 노는 치유를 위해 신나게 놀아 봐야 하지 않겠나. 김선우의 응원을 기다린다. ㅍ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