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연인들 - 김선우 장편소설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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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것은 시다


김선우는 내가 개인적으로 그의 생각 두어 자락을 잘 알고, 아는 만큼 절대 공감하는, 유일한 시인이다. 하여, 나는 그를 ‘천하시인’이라 부른다. 적어도 내겐 그의 시가, 시심(詩心)이 천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천하를 담고 있는 그가 천 날을 궁굴려 빚어낸 「물의 연인들」은, 그러므로 내게 소설이 아니고 시다. 그의 팽청(膨淸)한 목소리로 낭송하는 언어들에 귀 기울이면 이 시는 남모를 아름다운 환시를 공감각으로 전해준다. 


내가 본 크낙한 환시는 이 시의 비대칭적 대칭구조(unsymmetrical symmetry)다. 즉, 제2부와 제3부 사이를 경계삼아 꺾어 마주 붙이면 쪼개지면서도 포개지는 대칭성이 나타난다. 그 안은 물론 아리잠직한 환시, 즉 교차대구(chiasmus)의 직조 미학이 자리 잡고 있다. 즉, A-B-C-C'-B'-A' 구조다. 김선우가 처음부터 의도하고 이렇게 정교한 구조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그의 직관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해 그리 했다고 보는 게 맞지 싶다. 천하시인이니까.......^^


사실, 이런 건축학적 아름다움이 그야말로 내 개인적인 ‘환’시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프롤로그 첫머리에 인용된 그의 시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 일부와 에필로그 첫머리에 인용된 그의 시 <사릿날>의 일부를 마주치게 하는 순간, 그리고 프롤로그의 속 제목 “모든 곳에서 춥고 모든 곳으로부터 먼”과 에필로그의 속 제목 “한 물방울로부터 한 물방울에게”를 마주치게 하는 순간, 나는 이 구조를 떠올렸고 그 눈으로 전체를 보았기 때문이다.


전문가적 안목에서 그렇고 아니고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김선우의 독자로서 그의 미학에 좀 더 내밀하게 접근할 수 있다면 뭐, 그게 단순 ‘환’시든, 오류든 괘념할 일은 아니다. 덕분에 이야기 결결을 되작거리며 읽는 맛을 깊이 즐길 수 있어서 행복했으니 이 아니 행운인가. 감성으로 휘청거리며 읽는 일도 좋지만 지성으로 곧추 앉아 읽는 일도 여간 맛있는 게 아니다. 집중해서 읽는 내 모습을 아내가 보다가 갸웃한다. “지금 고시공부 해요?” ㅍㅎㅎ



1. [A: A'] 프롤로그: 에필로그


프롤로그를 이끄는 시는 이러하다.

 

번개 친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아프다

천둥 친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아프다


번개 친 후 천둥소리엔


사람이 살지 않아서 좋았다


에필로그를 이끄는 시는 이러하다.


금이 간 뼈를 보름처럼 구부리고

파도를 밀며 끌며 오는 사랑아

죽음보다 질긴 사랑이 있어

우리가 낳은 혼례의 어린 몸들 깊으니

일곱 잠째의 밀물이 이번 생엔 없는 것이어도

다음 생의 첫 잠으로 올 것을 아네


나는 「물의 연인들」을 읽기 전 이 두 시로 「물의 연인들」을 다 읽었다. 사람이 살지 않아 좋았던 시공과 다음 생 첫 잠으로 오는 인연 사이에 줄을 이으면 거기 모든 생명, 모든 죽음, 모든 주체, 모든 조건이 깃발로 걸릴 터이므로.


그러나 천하시인 김선우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다음 발걸음을 내디딘다. 프롤로그의 본문 속 제목은 “모든 곳에서 춥고 모든 곳으로부터 먼” 끊어짐과 멈춤의 사연을 휘몰고 온다. 비록 농염하고 아련함으로 가득 찬 에피소드가 넘실거리지만 그 넘실거림은 견결한 유령, 그 죽음의 금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에필로그의 본문 속 제목은 “한 물방울로부터 한 물방울에게” 이어짐과 흐름으로 “여리고 환한 목숨의 빛”(264쪽)을 전해준다. 비록 물의 딸 수린의 다비로써 대단원의 막이 내리지만 프롤로그를 한 바퀴 뒤집어 이어붙임으로써 뫼비우스의 띠, 그 생명의 영원한 순환 길을 연다.



2. [B: B'] 제1부 유령의 시간: 제4부 흐르는 사람들


유경은 생애에 가중 소중한 두 사람, 엄마와 연인을 모두 잃고 “7년째 허깨비처럼 살고 있”(38쪽)다. “유령이 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유령이 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38쪽) 유령은 아무리 달려도 갇힌 존재다.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끊어진 존재다. 아무리 흘러가도 멈춘 존재다. 유령의 시간, 그 봉인된 성에서 유경은 자신에 대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데)....... 그만 죽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살아 있”(38쪽)을 뿐이다. 이 때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도와주세요. 살인을 저지를 것 같아요. 수린이 죽어가요. 우리는 유령이 되고 있는 중이에요. 모두 죽어가요. 제발 와주세요.”(36쪽)


운명의 전조”(36쪽)인 편지 한 통에 이끌려 유경은 와이강으로 간다. 와이강도 유령의 시간이 진행되고 있다. 와이강의 딸 열다섯 살 수린이 죽어간다. 그 죽음을 막기 위해, 아니 그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수린의 어린 연인 열일곱 살 해울이 죽임과,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유경이 절규한다.


저 애를 좀 도와줘. 제발. 요나스!


우리는 유령이 되고 있는 중이에요.”(227쪽)


그러나 보라, 이 유령이 저 유령과 다름을. 갇힘을 깨고 유령이 달린다. 끊어짐을 부수고 유령이 손을 내민다. 멈춤을 무너뜨리고 유령이 흘러간다. 이 유령은 流령이고 저 유령은 幽령이다. 죽어가는 “수린에게서 물소리가 난다....... 강물의 본래 모습은 흐르는 것이지. 막혀 있는 것들은 썩는다....... 기억에 갇혀버리면 유령이 되지. 기억도 흘러야 한다. 나는 이제 흘러야 한다.......”(257쪽) 그렇다. 흘러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흘러서 살아야 한다.


고요의 터널을 빠져나오며 물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조용조용 지저귀듯이 흘러나와 와이산과 와이강의 곳곳으로 스며들며 번져가는 물소리 속에서 유경이 말한다.


그렇지.......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258쪽)



3. [C: C'] 제2부 가면을 쓴 달: 제3부 붉은 물 자국


살고 싶은데 살아지지 않는다. 사람이고 싶은데 사람이 되지 못한다. 유령의 조건이다. 유령인 유경의 조건은 엄마 한지숙의 자살, 그보다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연인의 황망한 죽음이다. 행복과 사랑의 관건이던 두 사람을 잃고 “푸르스름”(67쪽)한 “가면을 쓴 것 같은 달”(85쪽)에 홀려 피에로는 떠돌고만 있다. “달로도 지구로도 돌아가지 못한다.”(84쪽)


살기 위해서, 유경이 아프고 또 아프게 바라보아야 할 것은 과거를 비추는, 유령의 후광인 푸르스름한 달이 아닌, 현재를 드러내는, 인간의 조건인 붉은 강물이다. 지저귀는 기계들로 파헤쳐져 와이강이 흘리는 피, 그 “붉은 물 자국”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한다.


토막 나고 파헤쳐지고 적출되는 와이강이 유경의 머릿속에서 유린, 구타, 강간, 폭행, 모멸, 증오, 살인 같은 단어들을 마구 끄집어내고 있다. 악몽 속에서 유경을 움켜잡은 억센 손아귀가 유경을 끌고 다니며 패대기치듯이, 무서운 말들이 서로 엉킨 채 피 흘리기 시작한다. 엄마를 짓밟으며 그 남자가 퍼붓던 온갖 더럽고 잔인한 말들이, 왜 이 강변에서, 왜 또 이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악령들처럼 달라붙는지. 공포가 밀려든다.”(129쪽)


그리고


죽여 버리고 싶다, 저 새끼. 그런 자기 마음이 무서워 유경은 오줌을 지린다.”(84쪽)


급기야


흰 유령이 또 하나 쓰러지는 것 같은데, 오줌을 지린 것처럼 유경은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84쪽)


그렇다. 이 비인간적 도발에 대한 적의, 즉 살의야말로 인간생명에 대한 결곡한 자세다. 그 결곡함은 날카로운 공포가 된다. 공포는 살아 있는 것의 축축하고 질펀한 몸 반응, 즉 아랫도리 젖음으로 나타난다. 아랫도리 젖음은 “공포를 직감한 존재들의 울음”(167쪽)이다, 눈물이다.


유경의 눈에 눈물이 고여 오기 시작한다.


꿈꾸는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필요한 건 꿈이 아니라 행동이에요. 복수할 거예요.


그리고 유경의 몸이 발끝부터 떨려오기 시작한다. 별안간 해울이 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유경은 예감할 수 있었다. 맞닥뜨려야 할 순간이 오고 있다는 것을. 그 예감의 순간으로 오래 유랑한 바람이, 한 물방울이, 마침내 당도하고 있다는 것을.”(170쪽)


마침내


그리고....... 유경이 본다.


엽서의 맨 하단에 적힌 그의 이름.......


요나스 노드스트롬.


.......


“연우”


그랬다. 너였다. 이연우. 요나스 노드스트롬. 이리 와 봐. 요나스, 요나스, 요나스!

.......


어느 날 사라졌고 다시 돌아오지 못해 영영 길을 잃은 줄 알았던 이름이다. 가장 사랑하는 이름부터 차례로 지워나가 마침내는 유경 자신의 이름까지 지워지려 한 마지막 순간에 나타난 이름이다. 연우의 엽서 위로 유경의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붉은 눈물 한 방울.


그토록 찾고 싶어 한 이름을 손에 쥐고 유경은....... 가만히 쓰러진다.”(171-172쪽)


그렇게 쓰러진 것은 유경의 유령이고, 그 유령의 시간이다. 그렇게 쓰러진 것은 유령의 조건인 가면을 쓴 푸르스름한 달이다. 이제 유경의 그 붉은 눈물 한 방울은 수린이 토해 낸 “붉은 흙탕물”(215쪽)로 이어진다. 해울의 젖은 눈에서 흘러내린 “붉은 흙탕물”(215쪽)로 이어진다. 이 붉은 생명 감각은 문득 이런 각성의 순간을 낳고야 만다.


그 때 유경은 처음으로 자신이 와이강의 미래를 걱정했다는 걸 깨닫는다.”(219쪽)


다!



0. 이것은 물이다


아마도 천 날 동안 김선우는 오감, 아니 제육감(第六感)까지 모두 일깨워 물과 마주하였을 것이다. 물의 모습을 보고, 물의 살갗을 만지고, 물의 냄새를 맡고, 물의 목소리를 듣고, 물의 맛을 마시고, 또한 설명할 길 없는 물의 기운을 느끼고....... 동시에 그 물이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물인, 무경계의 세계에서 노닐었을 것이다. 하여 자신이 물이고 물이 자신인 경지에 이르고야 펜을 일. 단. 놓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돌아갑니다. 우리는 모두 돌아옵니다. 수많은 다른 모습들로.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한 방울로부터 한 물방울에게로. 그렇게 우리는 오고 갑니다.”(261쪽)


이렇게 김선우는 수린이 되고 해울이 되고 엄마가 되고 요나스가 되고, 끝내 와이강이 된다. 이렇게 김선우는 내가 된다. 물론 또 이렇게 나는 김선우가 되고 와이강이 된다. 김선우는 시인으로서 문학을 통해 생명의 고통, 그에 대한 사랑을 고민한다. 나는 의자(醫者)로서 의학을 통해 생명의 고통, 그에 대한 치유를 고민한다. 특정 부류 인간의 무지, 탐욕, 폭력으로 강이, 물이 살해되는 현실에서 어떻게 의학을 세우고 치유를 펼쳐야 할까. 이미 파헤쳐졌고, 여전히 파헤쳐지고 있으며, 그 상태에 갇혀 붉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강에게, 물에게 나는 더 이상 “울지 않기 위해”(147쪽) 무엇을, 어찌 해야 할까.


소심한 소시민인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사. 실. 상. 없다. 파괴는 너무 크고 눈물은 너무 붉다. 지금 여기서 나는 문득 김선우의 또 다른 유경, 저 「캔들 플라워」의 지오를 떠올려본다.


"아무튼 지오가 본 청계천은 번듯하게 치장된 인공의 슬픔이 가득할 뿐 자연의 생기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 본 이후 무의식적으로 계속 청계천을 바라보는 걸 외면해 왔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물의 높이로 누워 있어보니까 청계천의 마음이 느껴졌다. 물이 살려고 하는 기척, 깊이깊이 호흡하며 살아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기척이 아프게 느껴지면서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길 없이 답답하게 가둬놓았지만 길 없는 그 길에서  뭔가 살 길을 모색하며 수로변의 풀들을 살리고  아주 작은 생명들을 살리기 시작하고 있는 청계천 물의 절박한 마음이 느껴져서 한없이 미안했다. 생명의 의지를 가진 물에게 함부로 "뭐야, 죽은 물이잖아?"라고 말해버린 게 너무 부끄러워서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캔들 플라워」270-271쪽)   

 

슬픔에, 길 없는 가둠에 일방적으로 제압당해서 놓친, 생명의 기척에 대한 감각을 가차 없이 되찾는, 저 부끄러운 마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죽으라고 자신을 가둔 지옥에서 다른 생명을 살림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되 깨워 천국을 빚어가는 역설, 비대칭의 대칭이 부끄러운 마음을 되찾은 지오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다. 나, 오늘, 지오의 부끄러움으로 가만히 누워, 죽음 한가운데서 생명의 기척을 열어가는 저 강, 저 물의 마음으로 흘러가보리라. 와이강 편지에서 유경이 들은 연우의 목소리, 그 두 마디 말의 순서를 바꾸어 오늘과 내일의 강이, 물이 만나는 곳에 놓아두리라.


나는 고통스럽다.


나는 기쁘다.”(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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