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2장 본문입니다.  

 

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스러움만이 자기의 성(性)을 다할 수 있다. 자기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남의 性을 다할 수 있고 남의 性을 다할 수 있으면 물(物)의 性을 다할 수 있으며  물(物)의 性을 다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다.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와 하나가 될 수 있다.   

 

2. 흔히 훌륭한 사람이 훌륭한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성이 훌륭하면 그에 걸맞는 행위가 나온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세상에 어떤 사람은 본성이 훌륭하며 또 어떤 사람은 본성이 훌륭하지 않은가에 대한 선험적 구별을 전제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설혹 있다 해도 누가 그것을 알겠습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는 실천을 보고 나서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만큼 그 사람입니다. 자신이 실천한 만큼 그 사람입니다. 실천되지 않은 관념이나 지식이나 자세는 아직 그 사람이 아닙니다. 지극한 실천(至誠), 온 힘을 다한 선택만이 자기 본성을 나타낼 뿐입니다. 선택하지 않은, 실천하지 않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우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탐욕입니다. 탐욕을 거절하고, 견뎌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입니다. 그래야 중용의 이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입니다.  

 

이렇게 실천의 자리에만 자신의 본성을 매겨 넣어야 타인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참 소통은 실천의 소통입니다. 실천으로 관통하고 실천으로 흡수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참 인식의 통합이 꽃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타난 실천의 연대가 바로 사회적 본성입니다. 중용의 사회적 본질이 여기서 생겨납니다.  

 

인간사회가 중용의 이치를 담는 최종적 그릇은 아닙니다. 인간 아닌 존재, 그것이 생명이든 아니든 우리와 함께 시공간을 지나는 모든 존재와 소통함으로써 중용은 생태학적 지평을 획득합니다. 이름 없는 풀 한 포기, 눈에 띄지 조차 않는  작은 벌레 한 마리, 돌 하나, 아니 물 한 방울까지 우리와 본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를 우리가 사랑하고, 배려하고, 보살핍니다. 그들 모두도 우리를 사랑하고, 배려하고, 보살핍니다.  

 

세계가 온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유아적 허상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서로 마주한 주체이며, 소통의 동등한 당사자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일방적 제압, 착취는 있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새로워지고 자라야(化育) 합니다. 서로 경이로움을 향해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함께 그 존재 가치를 맘껏 펼쳐야 합니다. 이 경지가 大同입니다. 우리가 천지와 하나 되는(與天地參) 궁극의 차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천지와 하나 되는 일은 초월명상이나 면벽참선에서 일어나는 신비 현상이 결코 아닙니다. 지극한 실천의 부단한 확산, 치열한 선택의 무궁무진한 증폭을 통해 그리 되는 것입니다. 至誠에서 與天地參에 이르는 길가에 신비주의와 관념론이 더러 꽃으로 피어 우리를 잠시 쉬게 할 수는 있으나 여독이 풀리면 이내 일어서서 다시 걸어야만 합니다. 몸이 지나가지 않는 여정은 다 헛것입니다.   

 

3. 함께 살아야 할 인간 외 생명, 나아가 우리 모두의 삶의 근거이자 조건인 생태계 전반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무서운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저들이 승리하고 저들이 독식할 것입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만 대가를 치르는 게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비는 선악을 따지지 않고 내리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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