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1장 본문입니다.
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
정성스러움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성(性)의 작용이라 하고 밝음으로 말미암아 정성스러워지는 것을 교(敎)의 효과라 한다. 정성스러우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정성스러워진다.
2. 치열한 실천을 통해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은 생명의 타고난 본디 작용(性)입니다. 이치를 깨우쳐서 적확하게 실천하는 것은 가르침(敎)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둘은 결국 하나입니다. 실천할수록 명쾌하게 깨달아지고 꿰뚫어 알수록 옹골차게 실천하는 법입니다. 인식과 실천은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면서 둘입니다. 아주 진부한 말이지만 한 순간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전통적인 해석이 誠을 한사코 '정성스러움', '성실함'으로 파악함으로써 내적 자세 정도로 묶어두는 흐름이 굳어졌습니다만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우리는 誠을 철저히 동사적 의미로 읽습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천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정성스러움, 성실함의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내포를 넘어 적확하고, 어김없는 실천의 뜻까지도 담아낸다는 말입니다.
明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밝음'이라하든 '밝아진다.'라고 하든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이 드러나지 않는 해석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明은 선택과 결단에 의거한 인식 추구 행위입니다. 따라서 억압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그 어둠을 뚫고 올바른 인식을 지니는 것 자체가 이미 실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식은 쉽고 실천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허나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억압이 합리화된 사회일수록 인식의 전환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한 때 반독재 투쟁에서 전설적 실천가였던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의 환원을 통해 스러져 갔는지 우리는 수없이 목도한 바 있습니다. 올바른 인식은 그 자체로 벡터적 동력을 지니는 법입니다. 그들이 변절했다는 것은 그들의 인식이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바꿨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는 "잃어버린 10년" 운운 하는 자들이 지금 만들고 있는 우리사회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설혹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바꾼 주체들을 짐승 취급하면서 어떻게 그 열매는 독식하려 드는 것인지 그 심사를 도무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明은 誠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한결같은 실천 안에서 明은 明입니다. 誠은 明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제 방향을 잡은 인식 안에서 誠은 誠입니다.
3. 일전 송년 모임에 갔는데 뜻하지 않게 정치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30년 넘게 공무원으로 일한 친구와 가벼운 설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직 대통령에게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면서 현직 대통령은 신 대하듯 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정보와 지식은 죄다 일방적 홍보에 의존한, 한 방향으로만 줄을 선 것들이었습니다. 대화가 불가능했습니다. 소주 한 잔 따라주면서 이렇게 말 하고는 이야기를 접었습니다.
“찬 소주 한 잔 하고 정신 좀 차려야겠구만, 자네!”
돌아오면서 그 친구와 같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깊은 좌절감이 느껴졌습니다. 늘 훈계조에다 단정적인 어법으로 자신의 배타적 인식과 실천의 악순환 구조를 강화하는 사람들에게 誠과 明의 선순환이 과연 가능할까....... 이런 사람들의 세상을 어떤 지혜와 인내로 살아내야 할지, 연거푸 들이켠 술 때문에 몸은 흔들리는데, 정신은 명료해지기만 하고, 어허,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