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0장 여섯 번째 본문입니다.
在下位不獲乎上 民不可得而治矣. 獲乎上有道 不信乎朋友 不獲乎上矣. 信乎朋友有道 不順乎親不信乎朋友矣. 順乎親有道 反諸身不誠 不順乎親矣. 誠身有道 不明乎善 不誠乎身矣.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의 신임을 얻어서 다스릴 수 없다.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친구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못하면 윗사람에게 신용을 얻지 못한다. 친구에게 신임을 얻는 데에도 방법이 있으니 어버이(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친구에게 신임을 얻지 못한다. 어버이(의 뜻)에 따르는 데에도 방법이 있으니 자기 몸을 돌이켜 보아 성실하지 않으면 어버이(의 뜻)에 따르게 되지 않는 것이다. 몸을 성실하게 하는 데에도 방법이 있으니 선(善)에 밝지 않으면 몸에서 성실하게 되지 않는다.
2. 네 번째 문단에서 최상위 정치인에게 길게 다스림의 원칙을 설파한 데 이어 여기서는 백성과 직접 맞닥뜨리는 현장 관료에게 행정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윗사람, 친구, 부모로 이어지는 인간관계의 연결고리를 통해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이런 패턴은 제20장 전반에서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실천 주체인 자기 자신을 성찰(反)하여 적확하지 못하면(不誠), 즉 어긋남이 있으면, 벗어나 흐르면 모든 인간관계에 파행이 오게 되고 결국 올바른 행정은 펼쳐지지 않습니다. 관료의 행정적 실천이라는 것도 본질적으로 인간관계의 지평을 떠날 수 없는 것이고, 그 인간관계의 고갱이에는 늘 자기 성찰이 자리하는 법입니다.
3. 자기 성찰의 기준은 善에 밝으냐, 아니냐, 입니다. 善은 무엇입니까? 군더더기가 필요하지 않지요, 그대로 중용입니다. 善으로 표현되는 사적 실천이야말로 중용으로 표현되는 공적 실천의 뿌리요, 동력이요, 증거입니다. 사적 부도덕성에 눈감은 채 공적 도덕성을 입에 담는 것은 사기요 협잡입니다.
흔히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말들을 합니다. 허나 그 말은 여기에 쓸 게 아닙니다. 공적인 일을 사적인 이득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쓰는 상식적 경계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 현실은 이 문제에서 오류를 범함으로써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있습니다.
실천적 차원에서 사적 투명성과 공적 아우라의 일치는 불퇴전의 원칙입니다. 사적인 차원에서 거짓 언행을 일삼은 자가 어느 날 공적 위치에 앉았다고 해서 환골탈태, 짐실하게 변하는 게 아닙니다. 사적 이익을 위해 위장전입 한 자는 여전히 국가 간 계약도 위장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입만 열면 도덕적 훈계를 합니다. 아, 물론 독선(獨善)이지요. 그들의 독선은 어디에 기대고 있을까요? 바로 수신하지 않은 자의 자기확신이지요. 오로지 자기 경험, 자기 종교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4. 초등학교 6학년 아이를 둔 엄마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현 정치세력과 척 질 사회경제적 신분이나 이념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그 분 입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정치하는 사람들'은 왜 그럼 그리 무지할까요? 정보와 지식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핵심은 수신(修身)입니다. 자기성찰에 근본 결핍을 안고 있는 부류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지배블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에 어두운(不明乎善) 자들이 스스로 선하다 하면서 힘과 돈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성찰을 통해 자기규정을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희망을 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말하기에 현실은 너무 어둡고 아픕니다. 그 희망을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사람들이 스스로 희망을 버려 가고 있습니다. 지쳐 가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