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0장 두 번째 문단입니다.
故君子不可以不修身. 思修身 不可以不事親. 思事親 不可以不知人. 思知人 不可以不知天.
그러므로 군자는 그 때문에 몸을 닦지 아니할 수 없다. 몸을 닦으려고 생각한다면 부모를 섬기지 않을 수 없다. 부모를 섬기려고 생각한다면 사람을 알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알려고 생각한다면 하늘을 알지 않을 수 없다.
2. 앞 문단에서 이미 신(身)을 실천이라 번역한 바 있습니다. 군자가 군자인 증거는 실천에 있습니다. 말과 명상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생득적인 것도 아니고, 한 번 하면 영구히 자격증이 부여되는 것도 아닙니다. 간단없이 닦아야(修) 하는 것입니다. 삶의 조건은 그 때 그 때 다르기 때문이지요.
이런 실천의 수련은 부모(친족)를 모시는 일에서 처음 사회적 위치를 획득합니다. 이는 단순히 효의 가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부모를 모시는 행위는 부모를 닮는 행위입니다. 부모를 닮아야 하는 까닭은 부모가 바로 사회적 실천의 발원지이기 때문입니다. 부모한테서 중용이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모시듯 이웃(人)을 알아 갑니다. 그 이웃은 부모한테서 시작된 생명 연대의 한 지평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안다는 것은 물론 인식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소통의 앎입니다. 삶을 공유하는 앎입니다. 함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앎입니다. 서로 大同의 원리를 깨우치는 앎입니다. 더불어 성찰함으로써 성취를 일궈내는 앎입니다. 결국 그 이웃은 남이 아닙니다(天下無人)!
이웃을 아는 것은 하늘 이치를 아는 것에 닿아 있습니다. 하늘 이치는 생명의 연대성이니 이것이 곧 仁이요, 중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誠微(제16장)입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숭고한 하늘 이치란 것도 따지고 보면 이웃과 섞는 일상의 삶, 부모 섬기는 평범한 실천이 그 고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3. 이른바 "큰 일", 즉 정치나 언론이나 거대 기업 경영하는 사람들에게 걸핏하면 국민을 상대로 훈계하는 버르장머리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아는 바입니다. 자신들의 일이 특별하고 높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가소로운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 병역 미필자인 여당 대표가 보온병을 들고 포탄이라고 떠드는 기사가 큼직하게 나왔습니다. 포탄과 보온병을 구분하는 일은 하찮은 것이고 여당 대표하는 일은 큰 것이어서 그토록 뻔뻔한 것이라면 그 하찮은 일하러 연평도 날아가 구태여 망신은 왜 당하나 싶습니다. 국민에게 점잖게 훈계나 하고 앉아 계셨으면 그 아니 좋았겠습니까.
하늘의 이치는 커녕 이웃의 삶도 모르고, 이웃의 삶은 커녕 가족의 삶도 모르고, 가족의 삶은 커녕 제 한 몸 닦지도 못하는 주제에 군자연 하고 중용을 주워섬기는 무리들이 나라를 쥐락펴락하고 있으니 공자의 한탄은 그대로 오늘 우리의 한탄이 됩니다. 오호, 통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