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 - 유년의 상처를 끌어안는 치유의 심리학
우르술라 누버 지음, 김하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절창이 이 책 전체를 압축해줍니다.
지난 일은 지난 일.
포도주에 따른 물
다시 따라내진 못하리.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 없어라.
마지막 숨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197쪽)
이렇게 다시 읽어 봅니다.
일어났다면 일어난 거다.
이미 내 삶이 되어버린 상처
다시 베어낼 수 없으리.
허나,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파멸의 격한 호흡은
창조의 연한 숨결로 살아나리니.
2. 어린 시절에 감당 못할 상처를 입으면 그 상처를 통해 세상을 읽습니다. 그것을 저자는 "신념체계"라고 부릅니다. 좀 딱딱하고 거창한 느낌을 주는 표현인데, 아마도 한 번 그 틀에 사로잡히면 헤어나기 어렵다는 뜻을 드러낸 어법일 것입니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바에 제 생각을 덧붙이면 이렇습니다.
인간정신은, 도식적으로 말해, 감정, 이성, 의지의 측면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특히 만 7세 이전에는 이성과 의지가 아직 생성, 발달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 3세 이전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요. 그러므로 이 무렵 입는 정신의 상처는 바로 감정의 상처가 되고 감정의 상처는 존재 전체의 상처가 됩니다. 말하자면 감정이 정신으로서의 존재 전체를 대변함으로써 과잉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저는 격정(激情)이라 부릅니다. 격정의 에너지는 이렇게 증폭되어 나중에 생성, 발달되는 이성과 의지를 일거에 제압하기 때문에 한 번 일으켜지면 성찰, 제어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이 거듭되면 진실은 한 방향으로길을 내고 고착되기 마련이지요.
뇌 생리학자들은 생애 최초의 경험, 기억, 그리고 감정이 뇌신경에 새로운 회로를 설정한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궤도를 내는 셈이지요. 바로 그 궤도로, 차후 고통들은 자동 연결되어 내달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뇌 생리학으로 설명하든 정신 현상학으로 설명하든 결과는 하나입니다. "신념 체계"라고 표현하리 만큼 강박적으로 굳어지는 경향성이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견결한 이 경향성도 운명은 아니다, 그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입니다. "신념 체계"의 강고함에 틈을 내는 길, 즉 받아들이고, 이의를 제기하고, 관점을 바꾸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설명합니다. 이 설명 과정을 지켜보면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붓다의 가르침이 서구 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저자의 설명 방식이 여전히 서구적 형식논리 구도 안에서 진행되지만 적어도 현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서 진실을 찾아서는 사유는 붓다보다 더 포괄적이고 깊은 가르침을 주는 예가 없으므로 그런 감지가 가능한 것입니다.
사실 이 경우 붓다는 관점을 바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극단을 버리고 中道를 가라고 말합니다. 그 中道가 정도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중도란 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관점을 다른 관점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진실의 전체, 즉 대칭성/양면성를 한꺼번에 보고 자신이 치우쳐 있는 현실을 깨달아 유연하고 자유롭게 조절하는 것입니다. 이는 서구의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에 터 잡은 형식논리 수준에서는 불가해한 사유입니다. 이런 미흡함이 있지만 저자는 나름대로 길을 찾아갑니다.
3. 인상적인 부분, 첫째 대목은 여깁니다.
".......받아들이다는 말은 라틴어 '카페레(capere)'에서 나왔다. 이 단어는 '가지다'라는 말로 번역할 수있다. 즉, 주어진 것은 가진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어진 어린 시절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하다......."(202쪽)
크리스틴 콜드웰은 이것을 고백하기라 표현하고 영어로 owning이라 합니다. 말하자면 고통스럽고 비틀린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자기 삶의 일부로,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 생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흔히 고통을 겪는 본인이나 치료자나 고통스런 과거를 삶에서 도려내는 것을 치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바닥에 떨어진 상태에서 그것을 치고 올라가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게 치료이며 그럴 때 올라선 상태만이 자신의 삶이고 그 이전 바닥은 자신의 삶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 저는 정호승의 시 <성배>를 떠올립니다.
친구여
아직도 성배를 찾아
떠나고 있는가
우리가 인사동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그 잔을 기억하는가
그 막사발에 담아 마시던
피와 눈물을 기억하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마신 잔은
다 성배였다
4. 인상적인 부분, 그 둘째 대목은 어린 자아를 1-2세, 3-11세, 그 이후 10대로 나누어 다룬 것입니다. 각 기간마다 특징적인 정서 상태를 제시하고 거기에 맞는 아이의 반응을 그대로 체험함으로써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보살피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 .......내면아이를 위해 좋은 아버지나 좋은 어머니가 되려면 무엇이든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일부러라도 한 번 해보라. 의식적으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보라."(281쪽)
1-2세 때는 분리불안이 심하고, 위기에 처하면 숨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을 밝히고 거기에 맞추어 어르고 달래주어야 하다고 합니다. 향긋한 비누로 목욕을 하거나 마사지하는 것, 동화 테이프를 듣는 것,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 포근함을 느끼는 것 등응 제시합니다.
3-11세 때는 독립심과 자기 존중감이 문제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자기 감정을 표현하고, 거절하고, 결정할 수 있게 해야한다고 합니다. 어릴 때 배우고 싶었던 악기를 배운다든지, 청소년 영화를 본다든지, 하는 방법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 10대 때는 감정의 혼란 상태가 격심해지는 시기라고 합니다. 일기 쓰기, 즐겨 듣던 팝 음악 듣기, 철학적 고민을 담은 책 읽기 등을 제시합니다.
사실 내용 자체가 그닥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내면아이 이론/임상서를 보면 훨씬 더 자세히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유의 책을 처음 든 사람이 정작 어른의 시각에서 , 그럼 나의 내면아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래주나, 생각했을 때 막막해지는 공백을 메워줌으로써 평범한 내용은 오히려 고마움의 대상이 됩니다.
5. 마지막으로, 아쉬운 부분, 한 가지.
전체 내용이 개인적인 한계에 갇혀있다는 점. 이 책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내면아이 돌보기 문제는 물론 용서 문제도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적, 사회정치적 지평이 있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오늘날 더욱 중요한 화두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을 더 기다려야 하는지 ,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