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의 문서들은 대개 오랜 세월에 걸쳐 편집, 가필된 복합 저작물입니다. 시대와 상황, 그리고 손을 대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더하거나 덜어지고, 심지어 왜곡까지 되면서 오늘날의 최종(?) 텍스트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중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사로 비정되는 최초 저자에서 주희에 이르는 동안 숱한 손길이 이런저런 변형을 가한 것이지요. 그래서 문맥의 흐름이 부자연스럽기도 하고, 중복도 있고, 억지로 우겨넣은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전문가의 문헌비평이 세밀하게 밝혀낼 문제입니다. 저는 다만 제 삶과 인격 수준에서 그런 어기(語氣)와 내용을 가려 보고 나름대로 독법을 선택하면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중용>을 읽기 시작할 때 텍스트 전체를 보고 그 구조를 살피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조심스레 가다 보면 그럴 때가 오려니 하고 있었는데  제16장에서 많이 망설이게 되더니 급기야 제17장부터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공부를 멈추고 유심히 <중용> 뒷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중용> 텍스트는 대략  16장 내지 20장을 경계로 하여 앞 뒤 내용이 다른 듯합니다. 제2장에서 시작한 전반부는 중용에 대하여, 후반부는 성(誠)에 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1장은 이런 차이를 통합하기 위해 주희가 집어넣은 서론 또는 총론이 아닐까 합니다.    

 

문제는 제16장부터  제20장까지입니다. 제 눈에는  제17장에서 제19장은 확실히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추정컨대 후대에 끼워 넣어진 듯합니다. 이 판단에 의거 우리 읽기에서 제외하겠습니다. 문헌비평적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내리는 결단이라 오류 가능성이 있지만 억지스러워 보이는 내용을 구태여 견강부회하거나, 동떨어진 상태 그대로 문맥과 상관없이 주절주절 떠드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더 공부해 보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제16장도 느닷없이 귀신 이야기가 나와서 만만치 않게 낯설기는 합니다. 허나 앞서 읽은 대로  성미(誠微)를 중용의 다른 묘사로 읽으면 제16장이 <중용> 전반부와 제20장 이하 후반부를 잇는 지도리로 자리매김 되어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제20장 내용도 뭔가 복잡하고 어수선합니다. 다섯, 셋, 아홉 등 숫자를 통한 열거 어법 모두가 공자의 오리지널 어록인지도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중복된 문장이 걸러지지 않은 것을 보면 후대의 편집 과정에서  착잡이 일어났음에 거의 틀림없습니다. 誠을 직접 언급하는 후반부부터 진정성이 있는 본문으로 보고 싶으나 큰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전반부를 誠을 설명하기 위한 토대쯤으로 이해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냥 처음부터 진행합니다.    

 

2. 제20장 본문 첫 부분입니다.  

 

 哀公問政. 子曰 文武之政 布在方策 其人存則其政擧 其人亡則其政息. 人道敏政 地道敏樹 夫政也者蒲盧也. 故爲政在人 取人以身 修身以道 修道以仁. 仁者人也 親親爲大 義者宜也 尊賢爲大 親親之殺 尊賢之等 禮所生也.  

 

애공이 정치를 물었다. 공자는 말씀하셨다. "문왕과 무왕의 정치는 방책에 펼쳐져 있으니 그러한 사람이 존재하면 그러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그러한 정치는 멈춘다. 사람의 도는 정치에 민감하고 땅의 도는 나무에 민감하다. 대저 정치라는 것은 창포나 갈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를 행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사람을 취하는 데는 몸으로써 하고 몸을  닦는 데는 도를 가지고 하며, 도를 닦는 데는 인(仁)을 가지고 한다. 仁이란 人이니 친족과 하나 됨이 으뜸이고 의(義)란 의(宜)이니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 것이 으뜸이다. 친족과 하나 됨에 있어서의 순서와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 데 있어서의 등급이 예가 생겨나는 바탕인 것이다.  

 

3. 정치는 단순히 제도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습니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사람의 존부에 정치의 존부를 일치시킨 것입니다. 좋은 토양에서 나무가 잘 자라나듯 훌륭한 정치가의 손에서 바른 정치가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치를 행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故爲政在人).    

 

그러면 훌륭한 정치가인가 아닌가를 어떻게 판단할까요? 그의 실천(身)을 보고 압니다. 그 실천의 수련이 도리에 의거하는가를 보고 압니다. 그 도리의 수련이 어짐(仁)에 의거하는가 보고 압니다. 요컨대 어짐을 실천하는 사람이 훌륭한 정치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짐이란 무엇일까요? 仁者人也. 초간단 답인데, 그게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질다는 것은 사람답다는 것이다, 어진 사람이야말로 사람이다, 대략 이런 뜻으로 읽어서 큰 무리가 없겠지만 아무래도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이 느낌을 해소하는 일은 일단 뒤로 미루고 문맥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친족과 하나 됨이 으뜸이다(親親爲大)라는 말이 仁者人也의 이를테면 콘텐츠입니다. 물론 친족이란 말이 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마치 친족처럼"으로 읽으면 금방 괜찮아 집니다. 마치 친족처럼 사람과 사람 관계가 연속성, 일치성 속에 있는 것이 바로 어짐(仁)이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짐(仁)이란 생명의 연대성입니다.  

 

 仁者人也  親親爲大 뒤에 의(義)란 의(宜)이니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 것이 으뜸이다(義者宜也 尊賢爲大) 라는 말이 따라 나옵니다. 대구(對句)임에 틀림없지만 그 위상이 문제입니다. 義를 仁과 대등한 범주 놓으면  仁이란 가치로 훌륭한 정치가를 판단한다는 전체 논지가 어그러집니다. 그러므로 형식적 대구를 전체 뜻에 종속시켜 義를 좁은 의미의 仁의 대칭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 인간관계는 親親의 연속성과는 달리 불연속성을 전제해야 합니다. 현명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불일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차이점을 설명하는 말이 바로 親親之殺 尊賢之等 입니다. 쇄(殺)는 차이가 없다는 뜻이고 등(等)은 차이가 있다는 뜻이니 확연히 구분됩니다.  

 

결국 어짐(仁)은 생명의 수평적 연속성을, 옳음(義)은 수직적 불연속성을 담당합니다. 이 구별된 가치의 통합에서 예가 생깁니다(禮所生也). 그러면 禮가 仁의 상위개념일까요? 아닙니다. 禮는 仁을 성찰적으로 살핀 仁의 다른 이름입니다. 미분화적 仁은 그저 親親之殺지만 분화적 성찰 이후 仁은  尊賢之等이라는 義의 관점을 포괄하는데 바로 그것을 禮라 이름 한다는 것입니다.    

 

사물의 이치로 보면 仁이 禮의 근원입니다. 親을 거치지 않은 賢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연속성을 전제하지 않은 차등은 그 자체로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역사적 사실로 보면 仁은 이상태(理想態)이고 禮는 현실태(現實態)일 것입니다. 불연속적 계층구조가 정치의 질서를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절대 평등의 이상은 현실 정치의 폭압과 착취를 막기 위한 가치적 영원회귀로서 작동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禮에 발을 디디고 仁을 추구하는 실천 과정이 바로 바른 정치인 것입니다. 문득 20세기의 전설 체 게바라의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항상 불가능한 꿈을 꾸자!"  

 

 4. 바른 정치의 목표이자 기준인 어짐(仁)이 모든 인간이 "마치 친족처럼" "하나 되는" 생명의 연대성을 뜻한다면 그 구체적 방법은 무엇일까요? 개인적으로 파자(破字)해서 글자 뜻 새기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이 경우는 어쩐지 꼭 그래야 할 것만 같아 그리 해 보지요. 간결합니다. 仁은 두(二) 사람(人)입니다. 둘이 모여 이루는 그 관계가 사람됨의 본령이라면 바로 그게 소통, 즉 관통과 흡수 아니겠습니까?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어짐(仁)이 곧 중용입니다! 서로 소통함으로써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어짐(仁)이라는 말입니다.  

 

5. 그런데 본디 人은 보편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동이(東夷)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다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다시 보면 仁者人也라는 말은 어짐이란 동이족의 가치 내지 품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공자 사상의 핵심인 仁, 즉 中庸이 동이족의 사회정치적 실천이자 이념이라는 말입니다.   

 

이리 말하면 대뜸 우파 민족주의를 떠올리시며 실소를 머금으실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저 또한 막무가내 민족을 주려 끼고 열 올리며 현실 부조리를 외면하는 우파 민족주의 할 생각 조금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저는 仁, 즉 中庸이 오늘 이 땅에서 사회정치적 실천이자 이념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가 동이족임을 자랑하는 일이 얼마나 가소롭고 기막힌 자기기만인가를 말씀드리자 합니다. 

 

입만 열면 공맹을 말하고 도리를 논하는 이 땅의 이른바 주류-보수는, 지금,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매판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민족, 국격 운운 뒤에 숨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느라 끊임없이 거짓말을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찌 공맹을 안다고 할 것입니까? 이들이 어찌 仁을 안다고 할 것입니까? 이들이 어찌 중용을 실천한다고 할 것입니까? 이들이 어찌 동이족임을 자랑할 자격이 있다고 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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