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4장 본문입니다.  

 

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素富貴行乎富貴 素貧賤行乎貧賤 素夷狄行乎夷狄 素患難行乎患難 君子無入而 不自得焉. 在上位不陵下 在下位不援上 正己而不求於人則無怨. 上不怨天 下不尤人. 故君子居易以俟命 小人行險以僥幸. 子曰 射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  

 

군자는 그 자리를 바탕으로 하여 행하고 그 밖의 것은 원하지 않는다. 부귀에 처하여서는 부귀한 처지에서 행하며 빈천에 처하여서는 빈천한 처지에서 행하며 이적에 처하여서는 이적의 처지에서 행하며  환란에 처하여서는 환란을 당한 처지에서 행하니 군자는 어디를 들어가더라도 자득하지 아니함이 없다. 윗자리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을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 있어서는 윗사람에게 매달리지 아니하며 자기를 바르게 하고 남에게서 구하지 아니하면 원망할 것이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남을 탓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쉬운 데 처하여 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것을 행하여 요행을 바란다. 공자는 "활쏘기는 군자와 비슷함이 있으니 정곡을 맞추지 못하면 돌이켜 자기의 몸에서 (원인을) 찾는다."고 하셨다.  

 

2. 앞 장에서 중용 도량이 사람이고, 그 사람은 평범한 상대방이고, 그런 상대방의 처지에 서서 자신을 성찰하는 자가 군자임을 말했다면 본 장은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자득하는 자가 군자이고 , 그러려면 쉬운 데 처하여 명을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끝맺음은 동일하게 스스로를 살피는 것(反求諸其身)으로 기본 평행 구조를 살렸습니다.  

 

사람과 삶의 양대 화두 가운데 하나가 "자기 단일성" 문제입니다. 독립된 존재로 어떻게 자율성을 확보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이지요. 이 문제 또한 대칭적 가치가 마주하는 장을 형성합니다. 불연속적 자율이라는 한 가치와 연속적 의존이라는 가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두 가치는 어느 하나를 버리는 선택을 할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 하면 병이 되지요. 연속적 의존을 버리면 분열증이 되고 불연속적 자율을 버리면 우울증이 됩니다. 분열증은 남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측면을 포기한 것이고 우울증은 그럼에도 인간은 홀로 가는 생명일 수밖에 없는 측면을 놓친 것입니다.  

 

제13장은 분열증으로 가는 길을 경계했습니다. 남 없이 어찌 살 수 있느냐, 그러니 남 처지에 서 보라, 그리 말하고 있습니다. 제14장은 우울증으로 가는 길을 경계합니다. 남 탓, 환경 탓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자득(自得)함 없이는 참 사람이 아니다, 그리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지만 남이 있어 내가 되는 것입니다. 한 편, 남 없이 살 수는 없지만 남은 끝내 내가 아닙니다. 이 불가항력적 모순을 어찌하면 내 인격 속에, 내 삶 한가운데 통합할 것인가, 하는 고뇌가 다름 아닌 중용입니다. 이 중용은 물론 보편 가치입니다. 그러나 고뇌하는 주체가 처한 삶의 맥락과 지평에 따라 구체적으로 다른 역동성을 지닙니다.  

 

공자는 제후적 가치와 맞서고 있는 사대부입니다. 신라 식으로 말하면 성골, 진골 아닌 육두품인 셈이지요. 제후적 가치는 분열적입니다. 거기에 맞서지만 현실 벽에 자꾸 가로막히다 보니 공자는 부지불식간에 의존성이란 절망감에 휩싸이는 자신을 목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자신을 단호히 세우기 위해 자득(自得)의 비수를 꺼내 든 것이지요. 과연 고수의 심리학입니다! 
 

3. 그러면 그 자득(自得)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居易以俟命,  쉬운 데 처하여 명을 기다리는 자세에서 옵니다. 적어도 공자의 대답은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제시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개량주의처럼 보이니까요. 아무튼 공자는 극단적 모험주의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무리하게 일을 도모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혁명은 불가하다는 의중을 드러낸 셈입니다.  

 

아마도 공자는 진정한 혁명, 즉 정곡(正鵠)을 맞추는 일은 反求諸其身, 돌이켜 자신의 몸에서 찾아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길고 묘한 여운을 남기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다."는 예수의 말과 흡사한 울림을 줍니다.  

 

보는 이의 처지에 따라 불멸의 이상을 천명한 것으로도, 사회동원력을 지니지 못한 데서 오는 한계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상 완벽한 대동 세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유한하고도 부분적인 성취는 어찌하든 매한가지인 셈입니다. 방법론적 선택에서 우열과 정오를 가릴 수는 없습니다. 그 때 그 때 각기 흐름을 타는 것이지요. 설혹 이 居易以俟命만이 옳다 하더라도 무엇이 거이(居易)이고 무엇이 행험(行險)인지는 자신과 그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구체적 문제입니다.  

 

4. 허나 궁극적으로는 중용의 도가 부단한 성찰을 거쳐 나오는 내면의 힘 아니면 안 되는 실천임에 틀림없습니다. 변혁 또한 다르지 않겠지요. 사회적 성공과 인격적 성숙이 균형을 이루어야 진정한 성취라 할 수 있으니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런 논의는 항상 뒷문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결코 끝나지 않는 이슈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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