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본문입니다.  

 

子曰 回之爲人也 擇乎中庸 得一善則拳拳服膺而弗失之矣.  

 

공자는 말씀하셨다. "회(안회)의 사람됨은 중용을 골라서 실천하는 것이니 하나의 착한 것이라도 얻으면 받들어 가슴에 꼭 붙잡고 잃어버리지 아니한다."   

 

2. 중용이 군자에게 주어진 자격증이 아니고 찰나찰나 결단해야 하는 "선택(擇)"의 문제임은 앞 장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더 거론할 일은 없으나 연상되는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하고 넘어가지요. 
 

한국 불교 논쟁사에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가 이른바 돈점(頓漸) 논쟁입니다. 보조국사 이래 내려온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해 성철선사가 돈오돈수(頓悟頓修)로써 이의 제기를 하면서 태풍처럼 일세를 몰아친 논쟁이었습니다. 단박에 깨치더라도 그 뒤 끊임없이 닦아야 한다는 전자에 대해 단박에 깨쳤는데 뭘 더 닦을 게 있겠느냐는 반론이 후자이지요.  

 

후폭풍이 여전합니다. 둘 다 맞다는 포용론이 있는가 하면 각기 다른 용처가 있다는 현실론도 있습니다. 단박에 깨친 경험도 없고 성실히 닦은 세월도 없는 중생이 여기에 입 댈 처지는 아닙니다. 다만 깨친다는 것과 닦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 맥락에서 대칭구도를 이루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이 미흡한 논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즉 논쟁 자체에 가담하기 앞서 논쟁의 전후 연관성을 살펴 중생에게 빛이 될 수 있는 현실 지평을 열어 놓지 않은 채 "그들만의" 논쟁으로 깊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중생제도와 절연된 논쟁이 어떤 의미에서 부처의 길인지 문득 의문을 품게 됩니다.  

 

중생의 처지에서 보면 깨침의 높은 경지에 오른 분들이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회행위를 하는 것을 수긍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어리석어서 그리 생각한다면 별 도리 없지만 깨치지 못한 중생도 안 하는 행동을 생불(生佛)들이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을 보면 도대체 깨침이 무엇은 열고 무엇은 닫는지 황당해지지요.  

 

사회동원력을 갖춘 큰 스님이 거대한 사회 부조리를 보고도 관념적 거대담론으로 호도하는 일은 또 어찌 이해해야 될까요? 세속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깨친 자의 길이라면  그 깨침으로 관여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런 이원론이 과연 선불교의 근본 철학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다수 중생들이 힘들게 사는 것이 다만 미망에 빠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장(場)이 스님들과 전혀 다르다는 측면을  십분 고려해야 마땅합니다. 스님들한테 누가 와서 돈을 달랍니까, 새끼를 키워 달랍니까, 부모를 봉양하랍니까? 그런 고단한 삶에서 벗어난 산중 정진을 통해 얻은 깨침이, 닦음이  중생의 삶보다 어떤 의미에서 윗길일지 정말 한 생각 크게 돌이켜 성찰해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날 중용을 논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꼭 이와 같은 함정에 빠져 있기에 돈점논쟁을 예시하여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음양이 어떻고, 조화가 어떻고....... 고담준론이야 하늘을 찌르더라도  삼시 세 끼 밥 먹어야 하고 돈 있어야 아이 학교도 보내는 게 엄연한 현실 삶인데, 그 이야기에서 한사코 멀어지기만 하는 중용이 과연 참된 중용일 수 있겠습니까? 평범한 백성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내리는 선택이 모여 사회적 삶이 되고 문명이 되어 가는 법인데 거기에 뿌리 내리지 않은 지혜를 어찌 중용이라  하겠습니까?  

 

3. 안회는 사소한(一) 선(善), 즉 중용의 결단일지라도 소중히 여겨 삼가 받들어(拳拳) 가슴에  새겨서(服膺) 잃지 않았습니다. 한 일(一)을 "사소한" 으로 읽은 것이 지나친 해석은 아닐 터, 이는 대뜸 중용의 "평범함"과 상통합니다.   

 

이리 읽으면 안회의 완벽함을 찬양하는 독법에서 안회의 겸손함, 그리고 예의 "평범함"을 강조하는 쪽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여태까지 우리가 견지한 중용 독법에서 보면 이게 더 어울리겠지요. 나아가 중용이 그 때 그 때의 결단, 선택에 따른 역동적 실천이라는 사실에 부합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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