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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쓰는 내내 우울했다는 게 작가가 독자에게 건넨 첫 마디 말입니다. 이 소설의 독자로서 저 또한 읽는 내내 우울했다고 첫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 좀 더 세세하게 표현하자면 평범하지도 못한 소시민으로서 느끼는 깊은 두려움, 무명의 醫者로서 느끼는 아득한 절망감, 그리고 그럼에도 이런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인간으로서 느끼는 뼈에 사무친 슬픔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소설 전체 구조는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습니다. 누구나 다 알 법한,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유비통신’으로 입에 올릴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이야기’를, 어릴 적 엄마가 옷 솔기에 박힌 서캐 훑듯이, ‘두당’이 뼈에서 살코기 발라내듯이, 풀어주고 있어서 때로는 무릎을 치며, 때로는 한숨을 쉬며, 때로는 쌍욕을 해가며, 때로는 조소를 날리며 쉽게 이야기 전반을 챙길 수 있습니다.
윤성훈, 박재우, 강기준, 이 세 사람을 둘러싼 비루한 음모와 술책. 거기에 섞여드는 법조인, 공무원, 언론인, 정치인들의 더러워서 성공적인 거래. 섞이지 않는 ‘소수’의 고단한 투쟁. 이들을 가로지르며 무자비하게 전진하는 金權의 질주. 이 사태들의 변두리에서 속절없이, 하릴없이 독자들은 저들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저들의 너절하고 남루한 인격을 목도할수록 독자들의 막막함은 깊어갑니다.
손목에 억대를 후가하는 시계를 차고 다니면서도 주눅 드는 ‘사두품’ 골든 패밀리의 열등감조차 뒷목을 뻣뻣하게 만드는데 하물며 ‘육두품’을 거쳐, 로열패밀리임에랴. 想像不可之大本. 진골, 성골로 갈수록 인간과 인생 사이는 멀어지는데 현실 세상은 한사코 탐욕, 교활, 언변을 갖추어 성공한 사람과 훌륭한 사람을 동일 개념으로 몰아가니 도무지 ‘근본 없는 것들’은 마음 둘 바를 알지 못합니다.
이치를 따지고 보면 저들이 주무르는 엄청난 돈의 주인은 바로 ‘근본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탐욕, 교활, 언변으로 빼앗아 ‘저들만의 천국’을 만들었고, 도리어 저들이 돈의 주인을 ‘근본 없는 것들’로 날조했으며, 날조 당한 사람들은 실제 그런 줄 알고 살아갑니다. 작가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어서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 할 의무를 지닌 것이 작가라고 말합니다.
이 또한 ‘유비통신’인지 모르지만 모 재벌가에서 작가에게 접근을 시도했다는군요. 물론 의도는 빤합니다. 그 때 그 제안을 받은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태백산맥>을 쓴 사람입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요.” 이 말을 듣는데 몇 가지 생각이 겹쳐서 흘러가더군요. 과연 그 재벌가답다, 과연 조정래다, 과연 나는, 그럼.......어허, 이런! 그렇게나 말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 뭡니까. 남이 써놓은 글 읽고 나서 거기다 토 다는 일이나 하는 주제에 두려워한들 뭘 하며, 절망한들 뭘 하며, 슬퍼한들 뭘 하나. 어느 날 영풍문고에 들렀다가, 이 많은 책 가운데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이 없다니, 나는 대체 평범한 사람인가, 평범한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인가, 불쑥 의문을 품었던 기억과 정확히 맞물리는 생각입니다.
그럼 또 누군가 말하겠지요. 그런 당신 글 읽고 댓글 한 줄조차 달지 못한 채 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아니 당신 글 읽는 것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더, 더 많지 않은가, 호강에 겨운 자기모독 아닌가.......어허, 이런! 그렇게나 말입니다. 이런 의문을 주고받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낮은 목소리를 키워 가면, 비록 완전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정말 작가가 말하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요?
박재우가 이렇게 말했거든요.
“아까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힘에 의해 80년대 군부독재가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예, 그건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들 또한 그 경험을 확실하게 믿기 때문에 ‘경제 민주화’ 운운해 가며 다시 나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정치’라는 것과 ‘경제’라는 것의 차이를 모르고 설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군부독재 30년이 국민들에게 준 것은 무엇입니까. 억압과 공포 두 가지뿐입니다........경제는 전혀 다릅니다. 경제가 국민들에게 주는 것은 정치와 정반대로 꿈과 희망입니다. 오늘 고생한 만큼 내일은 더 잘살게 된다.......모든 사람들이 더욱 더 잘살기를 원하는 한 ‘기업이 잘되어야 우리가 잘살 수 있다’는 믿음은 그 어떤 종교의 주문보다도 신통력이 막강하고 강력합니다. 그러니까 아무 염려 안하셔도 된다 그겁니다.”(408-412쪽)
강기준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도 한 가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자본주의적이라는 점입니다.......더욱 더 잘살게 된다는 희망과 꿈을 품은 자본주의 열차의 승객들은 절대로 중간에 내릴 수가 없습니다.......그자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는 그 열차에서 뛰어내리라는 소린데, 그 소리가 잘살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고 있는 사람들 귀에 들릴 리가 있습니까. 그자들은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도 못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설쳐대는 아마추어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아무리 많아 봤자 한 주먹 감도 안 됩니다.......전혀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413-415쪽)
그리고 두 사람은 인간에게 깃들어있는 재물욕심 때문에 대중은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되어 있다고 단호하게 결론짓습니다.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대중. 깨어서 저항하는 민중. 앞은 현실이고 뒤는 당위입니다. 이 둘의 경계에서 고뇌에 찬 싸움이 벌어지겠지요. 책을 덮으면서 새삼 허수아비 춤이라는 제목을 생각해 봅니다. 정녕 허수아비 춤을 추는 자는 누구인가? 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