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대승철학
김형효 지음 / 소나무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1. 이 책은 2010년 5월, 대한불교진흥원과 원효학술상운영위원회가 제정한 원효학술상 교수 부문 대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원효사상에 워낙 깊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큰 기대를 가지고 읽게 되었습니다. 일언이폐지하면 "꽝"입니다. 그러면 왜 "꽝"인 책에 입을 대는가?  

원효는 우리 사상사에 우뚝 솟은 가장 높은 봉우리입니다. 아니 세계 불교사, 사상사에서도 그렇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비극이 생겼습니다. 높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연구하는 이가 드뭅니다. 연구하는 이가 드물기 때문에 이런 책으로도 학술대상을 받습니다. 이런 책이 학술대상을 받기 때문에 원효사상은 자꾸 오독됩니다. 그것이 안타까워 입을 댑니다. 

2. 저자는 원효의 사상을 대승철학이라 하고 동시적 이중성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핵심 사유로 인식합니다. 큰 틀에서 특별히 문제 삼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 타당성의 확보가 있었음에도 저자의 연구는 원효를 심하게 오독했습니다.  

무엇보다 저자는 원효의 이중부정을 불철저하게 독해함으로써 전체성을 훼손했습니다. 이것은 김상일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입니다. 원효의 이중부정은 공시적synchronic 측면과 통시적diachronic 측면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깁니다. 

그 공시적 측면은 모두 다 압니다. 쌍방향 부정이지요. 가령 有와 無가 대칭성을 이룰 때 이를 동시에 쌍방향으로 부정하면 非有非無가 되는 것입니다. 그 有無와 非有非無를 대칭시키면 원효 사상이 不二而不(守)一이 된다는 사실 쯤 누구도 모를 리 없습니다. 그것이 화쟁이며 그 화쟁이란 고갱이를 통해 원효의 대승사상이 펼쳐진다는 사실, 중요하지요. 그러나 이게 원효사상의 진경이 아니란 사실을 대부분 모르고 있습니다.  

有無와 非有非無를 다시 한 번 쌍방향 부정하는 통시적 측면의 이중부정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쌍방향 부정했다는 것은 꼭 한 번만 그리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한히 반복되는 부정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찰나 찰나 알아차리는 영원한 단속운동斷續運動입니다. 단속운동이기 때문에 이것은 분석된, 해체된, 그래서 그 때마다  특이점을 형성하는 사건입니다. 같은 유類의 단순 반복이 아닙니다. 늘 새로운, 경이로운 창조의 계기를 찰나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단박에 깨쳐 영원히 연속성을 보장 받는 결정론을 깨뜨리는 불연속의 확률론입니다. 깨침을 명사로 고정하지 않고 동사로 풀어놓습니다. 깨침을 개념의 세계에서 해방하여 살아 있는 현실의 세계로 돌려줍니다.  

원효가 이러한 거듭되는 쌍방향 부정으로 철저하게 구현하려는 바는 사이비 中道의 타파입니다. 사이비 중도는 중심에 안주하는 집착입니다. 그 중심을 평정심이라 하든, 해탈이라 하든, 돈오頓悟라 하든 거기에 머물러 있으려 하는 한 그것은 이미 권력입니다. 그 권력은 우리의 삶에서 역동적 시간성, 변화무쌍한 역사성을 거세하려는 어두운 힘입니다. 신화지요. 그 힘을 쥐고 놓지 않으려 권력은 자신의 자리를 경지境地라 일컫습니다. 그 경지에서 내려오지 않고 자리自利의 세계에 머물 뿐이면서도 스스로 부처라 합니다. 그러나 부처란 이타利他를 향해 경지에서 내려온, 절대 해체의 존재입니다. 그 내려옴, 그 해체가 바로 회향입니다. 회향은 평범함에 깃드는 것입니다. 이 평범함에 깃드는 것이 원효가 생각하고, 또 그 생각대로 살아낸 참된 중도입니다.  

참된 중도는, 그러므로, 자신의 경지를 버리고 언제든 어디로든 떠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꺼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선택이며, 가장자리로 나아가는 결단입니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시간과 역사의 요구에 감응response하여 자신을 흔들고 떨어 내던지는 일입니다. 혁명적 관통일 수도 있고 모성적 흡수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게 확률론적 삶입니다. 무애無碍입니다. 원효입니다!  

이런 진실에 도달하지 못함으로써 저자는 원효의 사상을 왜곡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역사적 위상, 그가 살았던 시대 자체 또한 비틀어버렸습니다. 저자는 원효가 살았던 시대를 '흥융기'라 규정했습니다. '흥융할 때'와 '망할 때'를 대비시킨 것으로 보아 저자는 아마도 흥륭興隆을 생각한 듯합니다. 원효 시대를 그런 의미의 '흥융기'라 했다는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역사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라 중심으로 그 시대를 이해하는 역사철학에 터 잡고 있음을 드러낸 셈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원효를 바라본 결과 원효는 호국불교의 범주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대승 정신이 권력자들의 탐욕을 엄히 경계했다는, 무사지공無私至公이 강조되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원효의 위상이 신라의 사회정치적 요구 안에 있었음은 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원효가 무열왕 김춘추의 사위였다는 정치적 의미는 그 어떤 원효 텍스트보다 저자 해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원효 텍스트를 맨 얼굴로 대하기 이전에 이미 자리잡은 통속한 선입견이 저자의 원효 이해 전반을 규정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을 저자가 정직하게 검토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랬다면 치밀하게 의도한 것일 테고 아니라면 철학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일 테지요.  

앞서 저자가 흥륭의 의미를 가지고 흥융이란 용어를 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소한 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일급 주류철학자이고 더군다나 원효를 연구해 최고상을 받은 지식인으로서 이런 실수를 범한다는 것은 참으로 수긍하기 어려운 일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 실수를 더 깊이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 실수가 절묘한 전복의 메시지를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고자 합니다. 

저자가 신라의 삼국통일이란 통속적 사관에 터 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 '작은' 실수가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흥융은 興戎으로 '전쟁을 일으키다'는 뜻입니다! 원효의 시대는 '흥하여 매우 번성한' 때가 아니라 신라가 삼한의 백성을 도탄으로 몰아넣은 '전쟁을 일으킨' 때인 것입니다. 저자의 표현 그대로라면 탐욕스런 신라 권력자들이 일으킨 전쟁에 반대하여 일심-화쟁-무애의 사자후를 토한 게 바로 원효의 사상인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를 때려부수는 게 통일이 아니라는 부르짖음이 원효사상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를 때려부수기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이는 게 어찌하여 참된 통일이냐고 꾸짖는 것이 원효사상입니다. 삼한의 백성 모두를 아수라 지옥에 처박으면서 불국정토를 들먹이는 게 말이 되느냐고 질타한 게 원효사상입니다. 신라 권력자들, 그들과 야합한 당나라 유학파 승려, 지식인들이 내세우는 통일-전쟁-불국토의 도식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포효가 다름아닌 일심-화쟁-무애입니다. 그래서 원효는, 저자의 이해와는 반대로, 그 시대 주류 승려와 전혀 다른 사상과 삶을 지닌 분입니다. 저자는 참으로 참람한 실수를 한 것입니다.  

저자의 실수, 아니 실패는 자신이 처한 현실 이해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매우 타당하게도 소유론적 혁명의 불가함을 말합니다. 그 대신 존재론적 혁명을 거론하면서 원효사상을 그 자리에 세웁니다. 여기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저자는 소유론적 지평에 서 있는 두 사상을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로 대비시킵니다. 물론 전자는 자본주의이고 후자는 사회주의입니다. 기본적으로는 둘 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하지만 실제 저자의 의도는 사회주의 비판으로 현저하게 경도되어 있습니다. 그는 평등에 대한 요구가 실은 존재론적 차이를 거부하는 대등론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면서 대등론은 극심한 '질투와 시샘'이라고 모독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이 '질투와 시샘'을 받는 존재론적 차이를 지닌 부류에 속하는 사람임을 드러내 보입니다. 글쎄요, 아무리 봐도 테리 이글턴이 저자를 질투하고 시샘할 것 같지 않은데요.......^^ 아무튼. 

이렇게 해서 저자는 자신의 위상과 철학을 원효의 그것과 은근히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원효사상이, 그 대승철학이 결국은 자본주의에 우호적인, 아니 그것을 격조 높게 옹호하는, 직관적 거대담론이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결국 책의 말미에 대왕암과 석굴암을 일치시킨 통속한 성속일원론으로 원효와 무열왕의 일치를 환기시킴으로써 원효사상의 열쇳말인 이중부정마저 내다버리고 맙니다. 저자의 철학, 그 속살을  최후로 들켜버린 역설이지요, 무사지공無私至公?, 과연!  

3.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저는 저자와 이 책 내용을 비판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궁극적 관심은 원효사상입니다. 원효는 다만 1400년 전에 살았던 신라의 승려에서 그칠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전체 우리 역사와 정신의 고갱이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를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우리가 혼란과 위기에 빠져 있을 때,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특히 북한과 관련한 사회정치적 어려움에 놓여 있을 때, 원효의 사상과 실천을 제대로 되살려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회 전 분야에서 이런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 치유 상담에 이론으로나, 실천으로나 원효의 일심-화쟁-무애를 녹여내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원효에 관한 이런저런 접근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한승원의 <원효>라는 소설을 가장 먼저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 어떤 전문 연구보다 제대로 된 원효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공부가 깊습니다. 그리고 바릅니다.  

4. P.S.- 요즘 한국 불교의 위기론이 차분히 확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외한입니다만, 거시적 안목과 집중 직관의 탁월성을 자랑하던 전통적 대승불교가 통째로 흔들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목하 빠르게 떠오르는 대안으로 이른바 초기불교가 있습니다. 세존의 본디 가르침에 가장 가깝게 육박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흐름이지요. 이 부분에 관해 외람되나마 관견 한 자락을 펼쳐 볼까 합니다. 

제 생각에, 대승불교와 초기불교는 마치 고전 역학과 양자역학의 관계와 같습니다. 고전역학은 결정론적이고 후자는 확률론적입니다. 전자는 연속적 궤도를 말하고 후자는 불연속적 분포를 말합니다. 전자는 거시 구조를 말하고 후자는 미시 운동을 말합니다.  

폴 디랙이란 특별한 사람이 있습니다. 고전역학의 범주에 속하는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맞물리게 하여 디랙 방정식을 만든 사람이지요. 그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고 생각을 넓혀 나아가는 과정의 연장선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 바로 반anti물질입니다. 반물질의 발견으로 세계는 대칭성을 띤 구조, 그 구조의 자발적 파괴라는 운동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승불교는 연속적 마음을 말합니다. 초기불교는 찰나 찰나 알아차림을 말합니다. 대승불교는 날뛰는 마음의 고삐를 말합니다. 초기불교는 고삐를 뒤흔드는 마음을 말합니다. 대승불교는 직관론입니다. 초기불교는 해체론입니다.  

원효는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연결고리를 통해 큰 진실을 발견한 폴 디랙과 같은 존재입니다. 원효는 직관과 해체를 동시에 해냈습니다. 그의 거듭되는 이중부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심一心은 이문二門으로 해체됩니다. 이문은 다시 긍정->부정->거듭 부정으로 무한히 해체됩니다. 거듭 부정은 부정의 부정입니다.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은 부정不定입니다.  

부정不定이 무엇입니까. 비결정 상태입니다. 긍정의 무한 분절입니다. 바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정식화한 불확정성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부정의 부정은 부정 x 부정으로 마치 파동함수 Ψ의 절대값을 제곱하면(|ψ|²) 비결정성의 확률값이 나오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원효에 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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