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닉
아니 에르노 지음, 조용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 제 경우, 본디 시를 더 가까이하는 오랜 습관 때문에 소설은 '철 지난' 걸, 다른 경로를 통해 접하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아니 에르노라는 문제 작가 또한 김탁환의 <천년습작>을 통해 알게 되어 한꺼번에 몽땅-그래 봐야 절판된 게 많아 몇 권 안 되지만-사들고 들어와  일거에 다 읽어버린 예에 속합니다.    

참으로 '일거에' 읽었다는 표현이 맞고, 그리고, 깊은 신음을 토해냈습니다. 찰나에 저의 '인간'이, 삶이, 관통되는 데서 오는 웅숭깊은 통증의 울림이었지요. 아, 이런 사람, 이런 삶, 이런 글쓰기가 있구나!  타인의 마음을 만지면서 살아 온, 아니 그리 산답시고 어리바리 지내 온 醫者의 세월이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처럼 느껴지더군요. 어허, 이런.......   

2. 아니 에르노의 문학은 예술의 주류적 전통적 정의, 가령, 피카소의, "예술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거짓이다." 운운, 을 단박에 부숴버립니다. 이 때 거짓이라 함은 필경 예술가의 창조력을 신화적 僞惡으로 담은 표현일 것이므로 아니 에르노는 이렇게 응수합니다.  

"일기를 감출 권리가 내겐 없다"  

그렇지요. <탐닉>은 <단순한 열정> 속의 삶이 진행되던 기간에 쓰여 진 아니 에르노의 일기이고, 그것을 가감 없이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문학의, 예술의 오랜 인습을 전복시키고 있습니다. 한 칼에 베어버린 것이지요. 예술가의 '감출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정직한 글쓰기의 지평선을 단도직입으로 열어버렸습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일단 아니 에르노의 말대로 감추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감추지 않는다는 것은 은폐나 미화, 또는 과소화나 과대화를 통해 자기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보호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려움과 불안, 중독과 편집의 한복판에 있는 자기를 방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어는 사랑의 탈을 쓴 학대, 이른바 '애지중지 학대'로서 도리어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방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를 죽도록 놓아두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내밀한, 小乘의 자기를 해체한다는 것입니다. 소승의 자기를 해체한다는 것은 大乘의 자기를 만드는 질적 전환을 기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아니 에르노의 구원을 위한 글쓰기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아니 에르노는 <칼 같은 글쓰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구원하고자 하는,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 그러나 우선 구원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닌 책들을 쓸 줄 모르기 때문(에).......난 존재들과 사물들을 대변하는 배우이자, 그것들이 존재하는 장소이며 그것들의 증인이기도 했습니다. 한 사회와 시간 속에서 그러한 존재들과 사물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구하는 것, 그래요, 난 내가 글을 쓰는 가장 큰 동기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느낍니다. 나 자신의 삶을 구원하는 방법도 바로 그렇게 얻어진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내 자신에 대한 구원은.......글을 쓰면서 나라는 존재감을 상실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해체인 동시에 극단적 거리두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내면일기만으로는 나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면일기는 내가 살아온 순간들만 보전할 뿐이기 때문이죠." 

결국 정직한 글쓰기란 자기를 해체하고, 죽이는, "칼 같은" 글쓰기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베는 글쓰기는 여러 곳에서 죄책감의 결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는 통속하게 윤리적 차원에서 읽으면 안 됩니다. 아니 에르노가 삶의 과정에서 온 생명으로 받아들인 급진적, 페미니즘적 사유와 실천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여기서 죄책감이란 사회적 각성으로 빚어낸 대승적 자기로 하여금 소승적 자기를 보편적/집단적 가치의 지평으로 이끌어내게 하는 해방의 힘입니다. 결코 사회적 규범이 개인의 내면을 옥죄고 다그치는 억압의 힘이 아닙니다. 아니 에르노에게 죄책감은 "내밀한 것과 사회적인 것을 분리시키지 않"는 융합의 동력인 것이지요. 

이 독특한 죄책감은 결국 아니 에르노의 텍스트를, 아니, 아니 에르노 자신을 독자에게 넘겨줍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저자의 죽음(La mort de l'auteur)'을 대가로 확보하는 '상호텍스트성'입니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바, 

".......글쓰기의 총체적 존재.......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들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런 다양성이 결집되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 곳은.......저자가 아닌, 바로 독자다. 독자는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인용들이 하나도 상실되지 않고 기록되는 공간이다.......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저자를 해체하면 독자가 창조됩니다. 이렇게 창조된 독자는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그 텍스트를 재창조합니다. 읽기와 쓰기의 분리선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글로 된 결과물을 남기느냐 아니냐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 지평융해를 아니 에르노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글쓰기가 주는 기쁨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이 뭔지 아세요? 누군가 내게 '당신은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또는 '이 책은 바로 나예요.'라고 말할 때랍니다."

 물론 아니 에르노의 삶의 자리 또는 context가 독자 각각의 것과 같을 수 없습니다. 전혀! 그럼에도 이런 일치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 에르노가 스스로 저자의 죽음을 택함으로써 text를 자기 밖으로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대로 "text는 그 총체성 속에서 하나의 자율적 생명체"가 된 것이지요. 그렇게 해방된 text는 개인의 내밀한 경험을 보편적/집단적인 것으로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열린 '사건'이 됩니다.  text는 더 이상 고정된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무한한 변화를 일으키는, 하여 context들과 상호순환하는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니 에르노의 문학과 삶의 무한연쇄가 일어납니다. 바로 이게 그의 정직함이 담아내는 강렬한 힘입니다.  

 

3. <단순한 열정>으로 담아내지 못한 진실, “정제되지 않고 암울한,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어떤 제물 같은 무엇”을 전하기 위해 아니 에르노는 이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보면 <단순한 열정>과 <탐닉>은 그가 자기 신과 삶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데 기여한 완벽한 짝패라고 알 수 있겠군요. 어쩌면 딸과 어머니? 뭐, 아무튼.    

 

<단순한 열정>에 비해 <탐닉>은 확실히 정제되지 않아서 생명의 냄새를 날것으로 맡을 수 있습니다. 비린, 그리고 곰곰한 냄새들.......훨씬 더 아니 에르노의 감정선들이 질펀하게 드러나면서 독자들을 同調의 감흥으로 빨아들입니다.  

 

<단순한 열정>에서는 열정이, 여기서는 공포와 불안,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절망/죽음의 감각이 탐닉의 이름으로 준동합니다. 그는 서문에서 애인인 S를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일으키는 절대적인 인물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다 각주를 붙이길, “젖먹이 어린이가 엄마와 떨어질 때 느끼는 공포감”이라 했습니다. 처음 읽을 때 마음을 찌르지 못한 각주였습니다. 아뿔싸! 과연 그렇구나, 이야기 전반을 꿰뚫고 흐르며 온통 마음을 흔들고 가는 공포와 불안이 거기에 젖줄을 대고 있다니! 수시로 흘리던 아니 에르노의 눈물을 이제야 전율로서 받아들일 수 있겠네요.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기다리고, 섹스하고, 글을 썼던 거였습니다.

 1988년 9월 27일 화요일,

"S......이 모든 아름다움."

이 비문(非文)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첫 문장, 이 비문. 그런데, 불과 7일 뒤,

"S와의 행복은 벌써 끝난 것인가?"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1990년 4월 9일에야 끝날 이야긴데 이미 예기불안은 벽두부터 섬뜩하게, 잔혹하게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지요. 두렵고 불안할수록 탐닉하고, 탐닉할수록 두렵고 불안하고.......이 지독한 악순환은 죽음의 무저갱으로 빨려들어 가고, 그 허무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글을 쓴다! 아니 에르노가 인류 최초로-흠, 이 정도 호들갑은 괜찮겠죠?^^-글쓰기와 섹스를, 목숨 건 노동이자 황홀한 유희라는 역설적 일치로 통합해냈군요. 으악(喝)!

 결국 아니 에르노에게 글쓰기는 단지 자신과 삶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글쓰기는 그 자신과 삶을 “걸작품으로 만들어 가는” 창조행위입니다. 필사적으로 글 쓴 만큼 열정을 다해 살아내고, 열정을 다해 살아낸 만큼 필사적으로 글 쓰는 상호 동력으로 한 생을 창조해 간 것이지요. 아, 어쩌면 이렇게도 單刀直入의 인간이, 인생이 가능할까요? 아, 어쩌면 이렇게도 단소정한(短小精悍)의 인간이, 인생이 가능할까요?  


4. 아니 에르노의 거울에 제 삶을 비추어 봅니다. 

 

나는, 내 인생은 單刀直入인가? 단소정한(短小精悍)인가? 물론 아니 에르노의 인간에, 인생에 나의 인간이, 인생이 一音으로 들어 있다. 그렇지만, 아니 그리하여, 나만의 context에서 나만의 글쓰기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아니 에르노와 겹치지만 온전히 포개지지 않는 나만의 “칼 같은” <탐닉>을 써내려가야 한다. 그게 아니 에르노를 읽은 사람이 할 일이다. 아니 에르노의 마지막 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제 그만 망설여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위험한 어떤 것을 쓰고자 하는 욕구. 마치 무슨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꼭 들어가야만 하는 지하실의 열린 문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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