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자와 신이치의 예술인류학 - 예술학과 인류학의 창조적 융합을 위하여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1. 제 나이 열 아홉 때 운명처럼 한 사유의 단서가 찾아들었습니다. 읽다 버린 일간 신문 쪼가리에 실린 글 한 편이 우연히(!) 눈에 들어 왔습니다. 어떤 사학자가 쓴 칼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지금 거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역사에서 변성(變性)과 항성(恒性)이라는 대칭적 논의가 전개된 글이었다는 기억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 때 이후 35년 동안 이 대칭성의 사유는 제 삶에서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법학을 공부할 때도, 신학을 공부할 때도,  한의학을 공부할 때도 이 흐름은 연속과 불연속의 거듭되는 겹침을 통해   절차탁마 되어 왔습니다. 때로는 들뢰즈한테서 때로는 하이젠베르크한테서 때로는 융한테서 때로는 김상일한테서 때로는 김상봉한테서 때로는 황진이한테서 때로는 <충청도 아줌마>한테서 이 도저한 쌍방향 사고, 모순을 끌어안고 역설을 달여내는 사고, 대칭구조를 자발적으로 깨뜨리는 사고, 끊임없이 유동하는 가로지르기의 사고를 익히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통시성과 공시성, 다양성과 통일성, 주체와 객체, 개체와 전체, 초월과 내재, 발전과 순환, 구조와 운동, 이론과 실천, 형식과 내용, 분석과 종합, 우연과 필연, 당위와 자연, 사건과 해석, 입자와 파동.......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대칭이 존재할 때 그 사이를 요동하며 뒤틀리며 공중제비 하며, 시중(時中)하는 조화, 선택, 양보, 선취, 공존, 희생을 넘나들었습니다.  모호함에 대한 혐오를 참지 못하고  쾌도난마 형식논리를 타고 여러 사람 다치게 하기도 했으며 , 양비론의 누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좌충우돌 20대와 30대를 거친 후 40대에 한의학에 발을 들여놓았지요. 

기대가 컸습니다. 음양론이란 대칭성에 터 잡은 학문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전통적인 음양론은 음양의 대대(對待)라는 구조 중심의 사고에서 전혀 벗어나 있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다양성 운운하며 오행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펼쳐지는가 하면, 형상(形象)이나 사상(四象)으로 사유틀을 고정하는 흐름이 워낙 강해 예과 1학년 때 이미 "이건 아니지." 결론을 내려버렸습니다. 그리고 한의학 사상의 슈퍼텍스트 <황제내경(黃帝內經)>의  맞은편에  서 있는 <상한론(傷寒論)>이란 텍스트를 잡았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저 쌍방향사고의 진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여 지금 사람의 생명과 병을 읽는 감각, 약과 침을 쓰는 이치, 우울증 환우와 상담하는  논리 모두가 <상한론>의 사상에 터 잡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앞으로도 엄청나게 넓고 깊은 미지의 지평으로 나아가야 하겠지만 <상한론>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고통과 깨달음, 질병과 정치, 문화와 과학, 기술과 영성, 의학과 예술을 통섭(通攝)하는 사유와 실천의 고향이 될 것입니다. 여전히 들뢰즈, 하이젠베르크.......들에 귀 기울이며 <상한론>의 경계를 넘나들겠지요.

2. 이 와중에 접한 책이 나카자와 신이치의 <예술인류학>이었습니다. 각각 독립된 글을 모은 책이어서 깔끔하게 잡아채는 끝맛이 없긴 하지만 이런 주제에 대한 기대로 흥미롭게 읽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좀 더 나아간 논의를  전개한 글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 빼고는....... 특유의 섬세한 관찰에서 나오는 언어에 대한 이해, 원시시대의 동굴과 유럽의 광장을 연결한 이야기, 예수와 기독교 이야기, 토러스-뫼비우스 띠-크로스캡 이야기, 플라톤의 이데아와 코라 이야기 등 모두 다글다글한  내용입니다.

개인적으로 제 경우 한약 처방에는 이미 "모순을 끌어안은 채 전체 사고를 하는 직관지"(본문 74 쪽)가 발휘된 지 오래입니다. 지금은 한창 상담의 예술성을 심화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물론 형식에서도 내용에서도 그리 돼야 하겠지요. 제 상담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은유치유와 역설치유입니다.  '바로 이게 예술성이다' 하고, 나카자와 신이치를 읽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 책에는 모든 언어는 은유와 환유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태여 문학의 차원에 기대지 않아도 말이나 글을 통한 치유상담은 근본적으로 예술인 셈입니다.  게다가 의자(醫者)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상담 내용 자체가 은유가 되게 하면 더 역동적이겠지요. 나아가 병과 가치의 모순을 모두 받아들여 전체 사유를 하게 하면 은유의 절정인 역설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병과 사람이 모두 흘러  통섭(通攝)의 강을 이룹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