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자아
디디에 앙지외 지음, 권정아.안석 옮김 / 인간희극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저는 아주 오랜 동안 삶의 기조로 자리 잡은 만성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 삶의 뒤집혀 맞물린 뫼비우스적 연장면에서 사십 대 중반에 의학, 우리 사회에선 모두 한의학이라 이름하는 학문을 공부했습니다. 졸업 후 아무도 가지 않았던 '상담치료 하는 한의사'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내남 없이 그 길을 낯설고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한의학과 한의사에 씌운 편견의 굴레를 벗기고 나면 그닥 이상할 것 없습니다. 오히려 폭넓고 깊게 마음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지요.  

그 동안 제가 깊게 주의를 기울인 부분은 우울과 불안, 특히 우울이었습니다. 한의사로서  어떤 치료적 접근을 할 수 있을까, 차별적 지평을 발견하기 위해 지난 십 년을 꼼짝 않고 그 질문을 궁굴려 왔습니다. 나름대로 한약, 침, 수기(手技), 상담의 독자적 패러다임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피부와와 마음을 하나의 문제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피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배워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마음의 문제와 마주세워 소통과 통섭(通攝)을 꾀하는 안목으로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우리사회, 특히 피부 특화해서 '대박나는' 의사, 한의사들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개념, 즉  피부=미용이라는 등식에 대한 저의 비판적 선입견이 작용한 탓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초저온 공기 요법으로 피부온도를 섭씨 0도로 낮추어 전신의 회복 기전을 급격히 활성화함으로써 각종 질환, 심지어 우울과 불안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귀가 확 뚫리는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어허! 

그 동안 마음의 문제는 다름아닌 "경계"의 문제라는 결론에 이르렀는데 몸의 문제 또한 그렇고, 그 둘은 결국 하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찰나에 알아차리게 된 계기였습니다. 피부는 면역의 최전선이고 면역은 나와 나 아닌 존재의 구별과 관련된 문제이니 갈 데 없이 피부는 내남의 "경계" 그 자체이자 의미입니다. 이 의미가 바로 정신이요 마음입니다.  마음에는 여러 층과 스펙트럼이 있겠지만 상호작용 아닌 것은 없으므로 부득불 "경계" 사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이 깨달음의 와중에 눈에 벼락처럼 들어온 책이 바로 디디에 앙지외의 <피부자아>입니다. 제목만으로 이미 제게는 천만 마디 말 이상의 울림을 주었습니다. 내용 여하와 상관 없이 크낙한 깨달음으로 제 가슴을 열어젖혀버렸습니다. 책을 대하면서 저자가 정신분석의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큰 울림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번개처럼 빌헬름 라이히가 떠올랐습니다. 아, 이 사람의 피부와 라이히의 근육은 반드시 만나겠구나, 예감은 적중했고, 거기서 사유는 일망무제로 그 지평을 넓혀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 책, 어렵습니다. 거침없는 영역 가로지르기와 전문 용어 쓰기, 과감한, 그래서 독자에게는 불친절한  압축과 생략, 게다가 처음부터 이 제목으로 한 권의 책을 쓰려고 한 것이 아니어서 드러나는 비조직성, 마지막으로 지은이에게 함몰되어 허위적거리는 듯한 번역.......사실 웬만한 프랑스어 학부 전공자 이상의 프랑스어 감수성을 지녔다고 '자뻑'하는 저조차 도무지 머리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문장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어렵거나 모호한 경우, 차라리 원어 낱말과 문장을 괄호 속에 넣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욕심내지 않고 눈에 띄거나, 뜻이 잘 들어오거나 하는 부분부터 발췌해 읽으면서 넘어가더라도 좋은 책임은 분명합니다. 거기서 그치지 말고 재독을 거듭하면서 문맥과 행간을 간취하면 책의 가치는 가파르게 상승할 것입니다. 이런 유의 프랑스 책을  만나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닐 텐데 번역자들이 치밀하고 농익은 모국어로 다시 번역해주었으면 하는 욕심도 납니다.  

3. 지은이의  전복적 명제는 이것입니다. 

"자아는 피부다." 

이 말을 역으로 하면 "피부는 자아다."입니다. 사실 이 말만으로도 전복적입니다. 피부를 그런 맥락으로 읽어 본 예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은이는 주어와 술어 위치를 바꿈으로써 더 한층 날카롭게 나아갑니다. 피부가 자아의 부분집합이 아니고 자아가 피부의 부분집합인 상황을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 명제로써 한 순간에 피부는 광대한 은유가 됩니다. 피부이자 피부를 넘어선, 현실과 상상을 가로지르는 절묘한 실재성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엄마와 아기가 살을 부비는 정밀하고 사소한 일상부터 반생태적 제국·자본주의 문명의 제약 불가능한 경계 란까지 실로 엄청난 폭량의 은유가 피부라는 경계, 즉 "가장자리"에서 요동치는 사건입니다. 피부는 다만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며 역동적 사건 그 자체입니다. 지은이는 피부의 기능 여덟가지를 말합니다. 지탱하기, 담아주기, 항상성, 의미, 교감, 개별화, 성욕화, 에너지화. 좀 더 엄밀히 말하면 피부의 기능이라기보다 피부라는 사건의 다양한 발현 양식이라 해야 하겠지요. 이런 차이는 지은이 또한 서구적 사유방식, 즉 명사적이고 주객이분법적인 생각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한 데서 왔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가 시종일관 견지하고 있는 자세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오늘날 서구문화에서 나타나는 관건적 정신정애가 경계선장애이고 보면 지은이의 선언은 현실적 근거에 터 잡고 있다 하겠습니다. 사실 우울증, 불안장애, 자기애성 인격장애 등 다양한 이름의 정신장애의 근저에 바로 "경계"의 장애가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문제는 전천후적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밀한 상황은 프랑스를 포함한 서구와 우리사회가 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유의 구체적 과정도 달라야 할 것입니다.  

서구 문화는 본디부터 개별적 인격의 쌍무적 계약 관계를 근간으로 합니다. 동아시아, 특히 우리나라 전통과는 사뭇 판이합니다. 그래서 이 책도 예컨대 접촉 금지와 초월을 말하는 대목에서 서구적 이원론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합니다. 전반적으로 역설의 문제를 유연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의 근본 원리가 대칭성이라는 사실, 하지만 그 대칭은 스스로 거듭 부정을 통해 서로 비춤으로써 진정한 무애자재(無碍自在)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지은이의 사상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결국 이 책을 아주 좋은 책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우리 마음으로, 아니 우리 피부감각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은이를 넘어서는 우리 독서는 피부의 심오함(폴 발레리)을 "명징한 모호성"으로 흥건하게 말랑말랑하게, 그래서 힘있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통찰을 돋을새김으로 가르쳐준 지은이에 대한 존경심을 바탕으로 해야 하겠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을 거듭 하고 있습니다. 

4. 거의 전 생애를 아토피에 시달리며 우울에 젖어 사는 한 제자에게 이 책을 내밀었습니다. 책 제목만 보고 한참을 흐느껴 울더군요. 그래서 올 겨울 이 책 부둥켜 안고 깨쳐라, 일러주었습니다. 피부-자아(Le Moi- Peau)라는 화두가 삶 자체가 되어버린  또 다른 제자와 함께 치유독서도 시작했습니다. 깊은 고통 속에서도 삶이 무한히 열린 깨침의 시공간임을 알게 한 많은 벗들과 더불어 이 책으로 또 하나의 경이로움을 열어가는 것이 과히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삼가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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