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관 가는 일은 말할 나위조차 없고 아이팟이나 스마트폰으로 보는 일도 전혀 없다. 한의원 TV가 없어진 뒤부터는 지나치면서 드문드문 눈에 들여놓던 영화도 없어졌다. SNS 셀럽이 이따금 올리는 영화 이야기도 더러는 읽지만, 감상할 생각은 않는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본 적은 여태 없다. 이제 와서 이드거니 돌이켜보며 기억 몇을 떠올린다. 그 기억, 열 살에서 스무 살 무렵까지 띄엄띄엄 박혀 있는 에피소드들이 지니는 연속성을 찾아낸다: 영화 속 서사 또는 연기() 세계와 내 현실 세계 사이 격절()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점.

 

영화 속 타자 세계와 내 세계 사이 경계를 명확히 짓지 못해 그 극단으로 극화된 타자 세계로 빨려들어 허우적거리거나 그냥 내 세계를 송두리째 허무 속에 놓아버리거나 한다. 작위와 부작위가 다를 뿐, 이들은 전형 우울증세다. 진실을 모른 채 쌓인 습관이 망연히 오늘까지 이어졌다.

 

이 습관에서 케데헌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케데헌 서사 일부를 귀담아들었을 뿐 영화 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누군가 원효 사상까지 내세우며 케데헌 담론을 구성한 뒤에야 워메, 뭔 일이다냐?’하고 관심이 느지거니 움직였다. 때마침 딸이 아이팟에 담아 놓았으니 보라 해 봤다.

 

오만 년만에 보는 영화다. 워메, 참말로 뭔 일이다냐? 눈을 떼지 못한다. 내 어휘로 곱촘하게”, 한자 어휘로 섬세치밀하게 만들었음을 한눈에 알아본다. studium:punctum, pheno:geno가 서로 관통하고 흡수하며 유장하게 흘러간다. 세계가 주목하는 데는 그만한 며리가 있으렷다.

 

이 글에는 케데헌 이야기를 자세히 하려는 의도가 없다. 내가 50년 넘게 화두 삼아 온 원효를 잘못 읽는 사람이 많아 오해를 풀 생각에서 출발했다. 앞서 누군가로 표현했는데, 실은 김범진이라는 명상가다. 그가 쓴 케데헌에서 발견하는 한국의 사유들을 읽고 든 의문이 발단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만이 아니라 대부분 원효를 매끄럽게이해한다. 전형이 일심(一心)을 그냥 한 마음으로, 화쟁(和諍) 목표를 화해로 이해하는 일이다. 지난 시절 권위주의 정권이 내세운 국론통일” “국민 화합과 뭐가 다르나. 그 정도라면 구태여 원효를 내걸고 얻는 날찍이 뭐 있나.

 

일심은 한 마음이 아니다; 대칭 운동하는 이문(二門) 사건을 같은 시공에서 경험하여 진실 전경으로 무한히 나아가는 삶이다. 화쟁 목표는 화해가 아니다; 일심을 향해 걸림 없이 살아가는 날카롭고도 동그란, 단단하고도 말랑한 역설 창조다. 하나든 화해든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립으로 보지 않고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바라보는”(위 책 128) 일을 사람들은 너무 쉽고 편하게 말한다. 더 높은 차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심리 상태가 아닌 한 이는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에서 일()을 뜻할 수밖에 없다. 그 일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무엇을 입에 담는 찰나 그 무엇은 이 세계 속에 도로 갇히고 만다. 결국 그 하나는 하나가 아니게 된다. 원효가 밝힌 일심이문(一心二門) 사상은 통속한 오해와 달리 하나를 지향하거나 결론으로 움켜쥐지 않는다. 이 또한 일원론이라는 극단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둘이 아니라고 해서 하나로 몰아버리는 짓은 인도유럽어를 구사하는 서구 단치(單値) 논리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 전경은 둘이 아니므로 하나도 아니다.”. 흔히 둘도 아니고/지만 하나도 아니다라고 읽는다. 아니다. 속 보깨는 이 진실에 닿지 못하면 원효는 영원히 오독된다.

 

케데헌은 그런 점에서 다른 모든 통속 담론을 뛰어넘는다. 루미가 진실 전경으로 들어오고 난 뒤에도 문양은 없어지지 않는다! 진실은 순수 투명한 일관(一貫)이 아니라는 뜻이다. 제작자가 다른 의도를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원효 실제 삶이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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