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버지라 부르는, 딸 아닌 딸 마흔일곱 살 여자 사람 하나 있다. 오늘은 광장으로 나가는 대신 그를 만나러 간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초겨울 냉기가 은근하고 얄밉게 파고든다. 보자마자 그는 추운데 옷이 그게 뭐야?” 한다. 본성대로다. 나는 나름대로 기상 정보 따라 알맞다고 여겼는데 제 눈엔 아닌 모양이다. “험험, 안 춥거든?” 해보지만 김 나는 국물이 눈앞에 아른거리니 그 잔소리가 옳거니 옳다.

 

미리 알아둔 음식점으로 들어가 만두전골을 주문한다. 차끈한 술 다습게 그득 부어 잔 부딪어 마시니 겨울비야 오든 말든 우린 봄날이다. 술잔 내려놓고 나는 바짝 다가가 ” ‘아이얼굴을 들여다본다. “심하게 휘지진 않았구나.” 안도하자 그가 경쾌하게 받는다. “누구 딸인데!” 오늘따라 그 말이 찌르르 심장을 파고든다. 이겨냈다는 말인지 견뎌냈다는 말인지 아리송하지만, 생각보단 걱정이 쉽게 내려져서 좋다.

 

그와 나를 이어준 끈이 격심 우울증이었기에 내게 그는 언제나 아픈 손가락이다. 가정생활 사회생활 다 각다분해 그 가슴엔 욕설이 따글따글하다. 나는 그가 쏟아내는 욕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응원해 왔다. 아픈 사람 욕설은 비명이며 신음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에서 대놓고 역성들었더니 참 자랑스러운 딸 두셨습니다~”라며 비아냥대는 사람도 있었지만 구태여 욕설 의학을 설파하진 않았다.

 

사실 욕설만큼 단도직입 진솔하며 엄밀한 언어는 없다. 이 뱉어내는 욕설은 비루하고, 이 부르짖는 욕설은 존엄한 까닭이다. 특히 깊은 병을 앓는 사람이 피 토하듯 퍼 올리는 욕설은 목숨 냄새 낭자한 생화학이다. 비린내 물씬 풍기며 들이치는 욕설로 그가 자기 영성을 드러낼 때 나는 그에게서 신을 본다. 거친 외마디로 달려오는 그 지극한 부드러움에 나는 녹는다. 나는 참 자랑스러운 딸을 두었다. 고맙다.


 

집으로 돌아가다 겪은 일을 그가 페이스북에 올렸다. “내 인생 아버지 같은 분과 서울서 만나 오랜만에 회포 풀고 집에 가는데 지하철역 앞에 웬 할머니 한 분이 우산도 없이 걸어가시네. 이 시간에 어디 가시냐 했더니, 새벽인 줄 알고 주일 예배드리러 나왔는데 밤중이라며, 그냥 교회 가서 자려고 한다셔. 나도 교회 다녀봐서 알지만, 요즘 교회는 잃을 게 많아 절대 문 안 열어놓거든. 걸으며 얘기 듣다 보니 울 엄마랑 동년배시다. 교회까지 모시고 찾아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문이 잠겨있네. 겨우 당직 집사 찾아 들어가 자모실에서 주무시게 이부자리 깔아드리고, 잠드시는 것까지 본 뒤 돌아섰어. 막상 집에 오려니 택시는 안 잡히고, 춥고, 무턱대고 따라가느라 어딘지도 모르겠고, 간신히 집 앞에 와서 깬 술 채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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