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가락 우울증세가 요 며칠 부쩍 불안과 갈마들며 심사를 쑤석거린다. 오늘은 그냥 아늑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다스운 국물 음식이나 먹으며 쉬고 싶다. 당최 그런 장소 그런 음식이 떠오르지 않는다. 퇴근 준비 끝내고도 미적거리는 동안 생각이 사방팔방 흩어진다. 맥 놓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서 무작정 일어선다. 어찌어찌 돌다가 결국 광장으로 가고 만다, 아이고! 집회는 이미 끝났다. 행진에 들어갔다. 함성을 좇아 일단 길 건너편에서 따라간다. 중년 여자 사람 하나가 종이 피켓 들고 나처럼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무슨 곡절 어떤 열정인지 모르는 채 나는 더럭 미안해진다. 그렇게 한참을 홀로 멀찌막이 따라 행진하다가 문득 시장기를 맹렬하게 느낀다. 가까운 데 눈에 띄는 음식점으로 불쑥 들어간다. 다행히 추어탕집이다. 소주부터 따라 꿀꺽꿀꺽 소리 내며 마신다. 비로소 긴 숨 내쉬어지니 심사가 조금은 홀가분하다.

 

잠시 뒤 종업원이 인사하는 느낌으로 보아 동네 사람인 80대 남자가 들어오며 익숙한 용어로 음식을 주문한다. 앉자마자 스마트폰 유튜브를 켠다. 묵음 아닌 상태다. 높은 주파수 음성이 빠르게 흘러들어 내 귀를 두드린 말은 곽종근이 허위 증언한다는 내용이다. 나는 고요히 고개 돌려 예의 갖추어 말한다. “, 선생님! 이어폰으로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편안한 식사에 방해가 됩니다.” 그는 말없이 아예 유튜브 자체를 꺼버린다. 지하철에서도 음식점에서도 저렇게 행동하는 늙은이가 드물지 않은데, 이의 제기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말은 대체로 거짓이고 대개는 비겁하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에 걸맞은 시민 정신으로 채워지지 못하는 까닭 가운데 하나다. 극우 집회에 60대 후반 이상 엘리트가 많다는 사실과 맞닿은 서글픈 풍경이다. 소주잔 비워내는 속도가 자꾸만 빨라진다.

 

얼얼함에 얹혀서 지하철을 탄다. 맞은편 자리에 앉은 70대 여자 사람이 눈에 띌 정도 동작으로 자꾸 다리를 주무른다. 눈여겨보니 심한 통증을 느끼는 듯하다. 나는 일어나 다가가 나부시 앉는다. “다리가 심하게 아프십니까?” 그가 표정으로 답한다. 나는 한의사임을 밝히고 스마트폰 속에 넣어 늘 가지고 다니는 침을 꺼내 든다. 딱 두 군데 자침한다. 그는 입을 딱 벌린다. “? 안 아파요!” 주위 사람들이 놀라 돌아본다. 나는 아무 일 없었던 듯 가방을 챙겨 들고 옆 칸으로 가 앉는다. 조금 있다가 그가 다른 한 사람을 이끌고 내게로 와 굳이 명함을 달라고 한다. 나는 명함을 건네주면서 당부한다. “너무 멀어 오기 힘드실 테니 가까운 한의원 가서 침 맞으세요.” 그동안 나는 수없이 길거리에서 이렇게 침 치료했다. 그들 가운데 다시 나를 찾은 이가 단 하나도 없음은 물론이다. 그리 기대하고 한 행동이 아니니까 당연하다.

 

다리 아픈 여자 사람도 소리 열고 유튜브 보던 남자 사람도 내가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인 세상에 살면서 하는 내 개입과 쉬고 싶다하다가도 뭣에 홀린 듯 광장으로 향하는 내 발길은 맥락이 같다. 개인 차원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아닌 상황인데 그 경계 넘어 크고 작은 공동체 문제 속으로 내 삶을 번져가게 하는 선택이다. 남이 내게 느끼는 고마움도 고까움도 내 삶에 직접 손익 문제로 다가오지 않지만 더 긴 시간과 더 넓은 공간에서 보면 공동체 네트워킹을 구성하는 작은 결절점이 된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하지는 않아도 이런 일은 적잖이 일상 속 제의 또는 루틴으로 자리 잡는다. 그 제의 또는 루틴이 한 사람 한 사람을 건강한 영인(靈人)으로 키워낸다. 영인이 대거 스러진 사회가 드러내는 살풍경을 지금 우리는 너무나 송연하게 목도하고 있다. 부디 이 아픈 공동체가 건강 회복해 K-영성으로 지구 치유 향도하길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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