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로서 향후 삶에 큰 변화가 생길지도 모르는 어떤 제안을 한 사람과 대화한 뒤 심사 복잡해진 일요일 낮. 점심 같이하자는 청을 정중히 물리고 그냥 지하철을 탄다. 생각에 없던 을지로4가역에서 내린다. 가까운 골목으로 들어서자, 사람 왜자기는 음식점이 나온다. 기본 차림으로 보이는 음식과 소주를 주문한다. 뜨끈한 국물에 속을 데우고 찬 소주를 들이켠다.
식사 마치고 나와 조금 걸으니 청계천 배오개다리 출입 계단이 나온다. 배오개다리는 본디 없었으나 복원 과정에서 만들었다. 배오개는 다리 정북향 나지막한 고개에 배나무가 많이 있어서 붙인 옛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다. 한자로는 이현(梨峴)이고 사극 아이콘 최숙빈이 살았던 이현궁(梨峴宮)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이명박 토건이 불러낸 뜻밖 서사가 흥미롭다.
이명박이 복원하기 전에는 복개 위에 고가도로가 있었고, 그전에는 구정물이 흐르는 천변에 판잣집이 닥지닥지 들러붙어 있었다. 청계천이란 이름은 왜 강점기에 붙였고 본디는 ‘개천(開川)’이었다. 조선 건국 초부터 개천도감을 설치해 치수에 힘썼을 정도로 한양도성 행정에 매우 중요한 생활하수로였다. 연인들 거니는 오늘날 풍경은 토건이 지은 ‘가벼운’ 낭만이다.
복원된 청계천을 놓고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명박 인간성과 실제 정치 행태를 보면 논란보다 더 깊은 쟁점이 존재하겠지만 그리 들어가지 않고 오늘 청계 이야기는 요즘 내 화두와 관련한 내용만 한다. 배오개다리 아래로 내려서자마자 눈길은 버드나무에 사로잡혔다. 정화 본성 버드나무가 물가에 있는 일이야 당연하거니와 내 주의는 다른 생명을 향한다.

죽은 등걸은 말할 것도 없고, 산 줄기에도 무성하게 핀 버섯-대부분 운지(雲芝)라 불리는 구름버섯-이 내 숨을 70번이나 멈추게 한다. 사진 찍느라 시공간은 물론 내 자신 마저 해체한 채로 흘러가다가 홀연 광통교에 가 닿는다. 지나온 물길이 아득한 소실점 되어 사라진다. 그래. 없다, 청계도 천도. 내가 본 것은 정화 버드나무와 그 주검에서 움터 산 버섯뿐이었다.
연인원 1억 9천만 명 다녀간 명성도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해당 70억 원짜리 물소리도 개천(開川)이란 장소와 풍경이 6백 년 동안 간직해 온 전언이 아니다. 개천은 상수(上水)인 수십 개 지천이 백성을 먹여 살리고 내온 허드렛물을 받아 한강으로 내보내 한양을 정화하는 하수(下水)로서 숭고한 음성을 소롯이 간직하고 있다. 나는 오늘 바로 그 소리를 듣는다.
개천은 이 물 이름이기도 하지만 정화 하수 기능을 온전히 하기 위해 물길을 “여는(開)” 행위를 가리킨다. 이는 물을 “붓는” 이명박식 토건과 전혀 다르다. 기술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삶을 이해하는 태도 차이다. 이명박 청계천 복원은 앵글로아메리카 제국이 저질러온 테라포밍에 해당한다. 장소와 풍경 고유함을 살해하고 우스개 삼은 범죄다. 바른길이 과연 있을까?
국권 상실기 왜 제국이 서울을 짝퉁 테라포밍으로 극심하게 도륙한 데다가 해방 이후 부역 정권이 미 제국 식 테라포밍을 중첩하면서 너무나 처참하게 망가뜨린 까닭에 나 같은 무지렁이 지식과 상상력으로는 절망밖에 할 일이 없다. 나는 속죄부터 한다. 나아가, 절망할 수 없어 할 말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이 아프고 슬픈 장소와 풍경에 더 깊게 귀 기울인다. 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