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有百花秋有月(춘유백화추유월) 갖은 꽃들 피는 봄, 달 뜨는 가을

夏有凉風冬有雪(하유량풍동유설) 바람 시원한 여름, 눈 오는 겨울

若無閑事掛心頭(약무한사괘심두) 쓸데없는 일 따위 마음 두지 않으면

便是人間好時節(편시인간호시절) 겨울 가을 여름 봄 모두 좋은 나날들

_무문혜개(無門慧開) 짓고 강용원 옮기다.

 

이 시를 발견한 곳은 우이동 어느 쌈밥집이다. 아직도 연탄난로를 쓰는 노포다. 밥 먹다 말고 내가 연탄과 난로 사진을 찍자 다른 곳도 있다며 바깥쪽을 가리킨다. 식당 주 공간 아닌 보조 공간인데 연탄 광으로 쓴다. 거기 벽에 떡하니 이 시 담은 액자가 걸려 있다. 승려가 쓴 것으로 보이는 붓글씨 서체가 특이해 사진에 담았다가 내친김에 번역까지 해 글 들머리 화제부터 삼았으나 시는 오늘 이야기 문을 여닫는 조연일 따름이다. 주인공은 연탄이다.

 

사진 찍고 돌아와 내가 연탄 이야기를 꺼내자, 주인과 직원이 옛 벗을 만난 양 오래된 기억을 서로 꺼내놓으며 수다 삼매로 들어간다. 1965년 서울로 와 도시빈민으로 살아온 내게 연탄은 어두운 기억으로 점철된 존재다. 무엇보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 번 쓰러져 바보(!)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부터 떠오른다. 연탄가스 중독이 거듭해서 일어났지만, 대책은 없었다. 절대빈곤이 마주한 절벽이었다. 그 암담함을 돌이키면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

 

그다음은 단연 고된 배달 기억이다. 성북구 동소문동 616번지는 대표 산동네로 당시 서울 사람이면 모를 수 없는 빈촌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극빈층에 속했던 우리 집은 대부분 연탄을 낱장 구매해 손으로 날랐다. 그나마 돈이 좀 돌면 두 장, 마르면 한 장을 가운데 구멍에 매듭진 새끼줄을 넣어 들고 산 아래 연탄 가게서부터 꼭대기 우리 집까지 날랐다. 초등학생인 내가 그 일을 했고 어른인 아버지는 일절 손대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다.

 

이제 연탄재 이야기다. 산동네 쓰레기는 일주일에 한 번 쓰레기차가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일주일 치를 모아 메고 들고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뛰어가 쓰레기차에 던져넣어서 버렸다. 왜냐하면 쓰레기차가 계속 멀어져가기 때문이다. 이때 주된 쓰레기가 다름 아닌 연탄재다. 이 일도 내 몫이었다. 눈 내리면 미끄럼 막고, 장마 끝엔 파인 길 메우는 경우 빼고 연탄재를 이렇게 모아줬으니 나도 난지도 표고를 100m 높이는 데 공을 세운 셈이다.

 

1950년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해 1990년대 초반까지 서민 사회를 상징했던 연탄은 한창일 때 서울에서만 하루 1,000만 장을 소비했다. 지금은 서울에서 1,800가구가 연탄을 쓴다. 그나마 이문동에 있던 마지막 삼천리 연탄 공장이 2024년 문을 닫았다. 전국적으로는 74,000가구 정도가 연탄을 쓴다. 20곳가량 남아 소규모 생산을 이어가는 중이다. 한 시대가 저물어간다. 연탄과 더불어 출발한 내 10대가 이제 70대로 접어들었으니 내 인생도 저물어간다.

 

연탄은 본디 왜놈 발명품으로서 병탄기에 들어와 우리 삶에 이식되었다. 그 자체를 바로 정치적 의미와 결부시켜 해석할 수는 없지만 고난에 찬 현대사 속 서민 애환에 드리운 식민지 유제, 이승만과 박정희 그림자를 지우고 이해할 수도 없다. 사라지는 연탄과 더불어 사라져야 할 유제와 그림자가 여전히 날뛰는 현실에서라면 연탄 한 장 바라보는 일이 예사로울 수 없다. 내란 상황에서 불안해하는 일은 연탄가스 중독을 걱정하는 일과 어찌 그리 비슷한가.

 

내란 수괴들이 벌인 기이하고 더러운 짓거리가 점입가경이다. “노상원 뒤에는 김충식이 있다. 김충식은 명신이 엄마 내연남으로 일본 왕족 밀서를 명신이 연놈한테 전달했다. 국 이 내란 맨 뒤에는 일본이 있다.” 어젯밤 분노와 슬픔으로 내가 처마신 술은 왜놈 발명품 가짜 소주다. 오늘 아침 일어나니 연탄가스 중독에서 막 깬 상태와 같다. 대체 이 악무한을 어찌할까.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이라니. 대체 어떤 삶이면 이렇게 노래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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