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준호(경제학자)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A. 네그리의 담론을 따르는 정치철학자들을 보면, 사회운동/사회변혁의 주체로서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주침을 통해 공통성(예컨대 '윤석열을 처단하라'라는 공통적인 구호)을 만들어 가는, 매우 능동적이고 또 자율적인 주체라 할 수 있는 다중(multitude), 즉 '응원봉'을 든 시민들의 유연한 배치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나는 이들 자율주의적 정치철학자(네그리언)들이 사회운동의 새로운 주체로서의 '다중'에 주목하고 또 이를 강조하는 것을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이러한 '다중' 개념을 절대화(?)하는 지적 경향에 의해, 노동자와 농민을 축으로 하는 각성된 ‘계급’ 주체성과 그 앙가주망들이 사회운동/사회변혁의 주체를 논의하는 데 있어 너무 뒤로 밀려나버리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내 나름의 우려를 갖는다.

네그리 및 하트가 강조해온, 후기산업사회 단계의 자본주의에서 '다중'을 핵심 저항 주체로 인식하는 근거로 볼 수 있는, 이른바 '네트워크적 생산(특정 사업장/공장 차원이 아니라, 그 너머의 전 사회적 차원에서 잉여가치가 생산되고, 결국 자본은 이를 기생적으로만 추출, 채굴하는 새로운 축적방식)'은 매우 중요한 경향이며, 나아가 그래서 이 경향들은 법칙화하고 이론화할 수 있는 것이긴 하다.

그렇지만 우리 한국자본주의의 '실상'을 보면 개별 사업장이나 또는 공장 차원에서, 또 그 차원에서의 자본이 벌여대는 노동에 대한 통제와 착취의 수준, 바꿔 말해 네그리가 말한 '네트워크적 생산'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자본축적의 수준은 여전하므로, 사회운동/사회변혁 주체로서의 각성된 노동자들, 즉 '계급'이란 것은 여전히 중요하며 또 해방운동 중심에 서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른바 '남태령'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응원봉'을 든 다중과 '트랙터'를 몰고 온 계급은 맞물려가야 된다. 이는, 양자 간의 유기적인 결합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저항운동의 한 가운데에 누가 서 있어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양자가 결합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태령'에서처럼 주체성으로서의 '계급'이 '다중'의 특이성을 끌어안고, 그들과 수평적으로 마주치며, 또 그들과 함께 해방적 기획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계급'이 보여왔던 우리 사회 내 중심성과 그 특유의 결정성(determinacy)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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