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석식 소주는 일제가 1899년 발명한 ‘저질’ 아니 ‘가짜’ 소주다. 싸구려 원재료를 발효시킨 뒤 연속 증류해 맛과 향을 모두 날려버리고 역한 냄새만 남은 주정에다 물을 타서 만든다. 역한 냄새를 감추려 인공감미료를 섞는다. 그렇게 오로지 취기만을 목적으로 하는 알코올로 ‘개돼지’ 대중을 순치시킨다. 이 사악한 제국주의 부산물은 그대로 식민지 조선으로 번져간다. 관계법과 조세제도까지 바꿔가며 소주 시장을 석권할 수 있게 해준 조선총독부와 부역 대한민국 권력 덕에 희석식 소주는 소주 본진이 된다.”
나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지 못한다. 1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50년 넘게 이 희석식 소주를 마시며 순치된 개돼지로 살아온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 서둘러 한의원으로 돌아와 비통하게 운다. 식민지에서 태어나 무지렁이 부역자로 살아가는 참담함이 이렇게까지 파고들다니. 가짜 소주, 그 알코올에 온 세포가 절 듯이 내 영혼도 절어 이렇게밖에 살 수 없다 싶으니, 통곡은 여간해서 잦아들지 않는다. 스스로 우는 소리를 감지하는 순간 그 소리는 더욱 크게 꺽꺽대고 만다. (2014.3.7. <개화산 이야기, 그 후렴>)
가짜 소주와 헤어지기로 다짐하며 한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다. 가짜 아니고 진짜 소주 마시려면 돈이 많이 들어 천하 가난뱅이인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어서다. 대신 막걸리 마실 경우도 같다. 값싼 막걸리에는 제국 악질 기업 몬샌토가 독점 공급하는 아스파탐이 들어 있다. 아스파탐 쓰지 않는 막걸리 가운데 왜식 누룩을 넣은 것은 값이 세 배다. 우리 누룩을 쓰는 막걸리는 훨씬 더 비싸다. 맥주 경우도 같다. 국산 맥주는 효모가 거의 없고 맥아만 있는 가짜다. 진짜는 비싼 제국 것들이다.
술마저 값싼 가짜가 판치는, 가짜를 거부하려면 더 성공한 부역자가 돼야 하는 모순이 판치는, 이 모진 식민지 거리에서 나는 오늘 저녁도 홀로 술 한잔할 텐데 모욕감 벗어날 방법을 당최 모르겠다. 물론 단순명료한 외길은 금주다. 금주 또한 소담한 반제 병기다. 문제는 술이 없을 때 내 삶 자체가 무엇인가다. 어떤 깊은 결여를 부둥켜안고 사는 내 삶에 대한 기림으로 나는 술을 마신다. 그 결여는 일제가 판 구덩이다. 이 중첩모순을 역설로 달여내는 문제에 금주가 답은 아니다. 큰 악이 작은 선을 무심코 물들이므로.
진부한 질문: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속한 구성원이 정의로울 수 있는가? 한 사회도 한 개인도 단순하지 않으므로 이 질문은 단순한 답을 얻고자 제기되지 않았다. 답은 복잡하고 모호하다. 복잡하고 모호한 답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복잡하고 모호함으로 그런 사회에서 승리/성공하는 행위가 문제다. 이들을 일러 기회주의,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말하면 매판 부역이라 한다. 복잡하고 모호함으로 그런 사회에서 패배/실패하는 행위를 감행할 때 단순한 답에 접근할 수 있다. 이 단순함은 불순물이 지닌 정의로움이다.
불순물이 지닌 정의로움, 더 정확히 말하면 불순물이기에 정의로운 사태는 큰 악이 작은 선을 무심코 물들이지 못하게 막는다. 자기 삶이 사회 전체 악 앞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는 진실을 정면으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임으로써 자기에게 엄습해 오는 개체 악 하나하나와 맞서 싸운다면 지더라도 그 패배 때문에 작은 선은 결코 큰 악에 무심코 물들여지지 않는다. 이 싸움이 제국주의에 부역한 존재론 철학을 갈아엎고 팡이실이 공생 윤리학을 세우는 혁명이다. 참 혁명은 가짜 소주 한 잔에서 비롯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