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어린 시절 이웃이나 동무 가운데 가끔 불상사를 당하는 것을 보고 들은 적이 있다. 중학 1학년 같은 반의 한 동무는 여름 방학이 끝난 뒤 나타나지 않았는데 멱감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향 마을에서 산 넘어가면 걔네가 살던 곳 근처 저수지를 멀리서 볼 때면 동무가 거기서 죽지는 않았을까 근거 없는 추측을 한 적이 더러 있다. 더 어린 시절 아랫동네의 한 청년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을 때는 그를 위한 굿이 열리기도 했다. 당시 구경 가서 누군가가 울면서 흰 천을 가르고 나아가는 것을 본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런 의식을 천도굿으로 부른다는 것은 커서 알게 되었다.

그 무렵 자살하는 사람이 간혹 있었는데 대개 여성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960년대 초 이전 전근대 농촌에서 여성이 죽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던 것 같다. 하나는 나무에 목매달아 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에 빠져 죽는 것이다. 누가 스스로 죽고 나면, 무슨 산의 어느 골짜기 소나무에서 광목천으로 목을 매달았다느니, 누구네 논 웅덩이에서 죽었다느니 하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여성이 죽기 전에 꼭 하는 일이 있었는데 바로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는 것이다. 어릴 적 논 웅덩이를 지날 때면 고무신이 있는지 버릇처럼 살피곤 했다.

고향마을에는 ‘정신 나간’ 여성도 두엇 있었다. 그들이 시집오기 전 이미 광기를 드러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증상이 발현된 곳이 고향마을이었다는 것은 그들의 질환에 내 고향의 무엇인가가 한몫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그러고 보니 전근대 농촌의 자살자와 정신질환자가 대체로 여성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듯싶다. 고향의 경우 맨 아랫마을에는 신체 부자유, 가운데 마을에는 언어 장애, 맨 위 마을에는 정신질환을 보이는 사람이 자주 나온다는 말이 있었는데 돌이켜 보면 그런 점도 우연이었던 것 같지 않다. 내 기억으로 신체 부자유와 언어 장애를 지닌 사람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정신질환을 보인 사람은 자살자와 더불어 대부분 여성이었다. 질병의 사회학 견지에서 보면 그런 상이한 증상들은 전근대 한국 사회의 성역할 구분, 남녀불평등 구조 등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여겨진다.

과거에 농촌으로 시집온 여성은 대개 엄청난 억압과 착취로 고통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 누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꼭 고무신 벗었던 것도 그런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의 전통 생활 습관에서 신발을 벗는 행위는 어느 한 공간에서 다른 한 공간으로 들어갈 때 일어난다. 세상을 하직하는 여성이 고무신을 벗은 것은 생전에 당했던 수모와 억압, 고통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고 믿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자살을 포함한 죽음은 사회적 성격을 띤다. 이전의 농촌에서는 자살하는 일이 사실 많지 않았다. 살인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은 어떤가? 2000년대 이후 한국은 세계에서 자살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되었다. 1990년대까지 한국의 자살률은 매우 낮았던 편이다. 자살률이 갑자기 높아진 이유는 무엇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가 엄청난 사회적 위기를 겪은 데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자살률은 2020년대에 들어와서 약간 낮아졌으나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남녀자살률에서도 반전이 생겼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 자살하는 사람은 남성이 훨씬 더 많다. 2022년을 기준으로 하면 남성 자살률(35.3명)은 여성(15.1명)의 2.3배에 달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화한 결과 남성이 받는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커졌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여성 차별, 성 불평등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자살의 풍속도도 많이 달라졌다. 옛날에 자기 목숨 끊던 여성들이 남긴 것이 오직 고무신 한 짝이었다면,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1990년대 이후라고 여겨진다. 일가가 자동차를 탄 채 저수지 등에 빠져 죽는 경우가 간혹 보도되곤 했다. 자살할 때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죽는 경우가 생긴 것도 새로운 현상에 속한다. 그리고 최근으로 올수록 자살의 이유로 경제적 원인이 언급되는 비율이 높아졌다. 이전에는 굶어서 죽는다는 말은 있어도 가난해서 자살한다는 말은 없었는데, 오늘날은 가난이 자살의 중요한 이유가 된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이 자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빚일 가능성이 크다. 그 점을 말해주는 것이 자살률은 부채의 증가에 비례해서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자살률이 급증한 2000년대 이후 가계부채도 급증한다. IMF 위기가 닥친 1997년 한국의 가계신용은 GDP 542.0조 원의 39.0%인 211.2조 원으로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2009년에 776조 원으로 GDP(1,255.3조)의 61.8%로 커지고, 2010년대 이후 더 급속하게 늘어나서 2015년 1,203.1조로 GDP(1,740.8조)의 69.1%, 2020년 1,726.1조로 GDP(2,058.5조)의 83.9%, 2023년 1,885.5조로 GDP(2,401.2조)의 78.5%가 된다. 부채의 이런 증가와 자살률의 증가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작용하는지 명확하게 규명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두 지표가 동시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두 현상 간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충분한 정황 증거로 여겨진다.

자동차를 일가 자살의 도구로 삼거나 아파트에서 떨어져 목숨을 끊는 일은 나무에 목매달거나 웅덩이에 빠져 세상을 하직하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사람들이 목숨을 끊는 것은 세상 살기가 어렵기 때문일 테지만 그 어려움의 시대적 차이가 커 보인다. 옛날에 사는 것이 어려워 죽는 사람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세상 하직할 때 남길 수 있는 재물은 매우 미미했다고 할 수 있다. 목매달거나 웅덩이에 빠져 목숨 버리던 여성들이 고무신 한 짝 달랑 남겼을 뿐이었던 것도 그런 점을 말해준다.

오늘날은? 저수지에 자동차 타고 들어간 일가,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의 경우 상당한 자산을 남겼을 공산이 크다. 자동차가 있으면 거주하는 주택이 있을 것이고 그 안에 가재도구며 가전제품, 전자기기 등 상당한 재물이 있을 것이다. 아파트 건물에서 몸을 던진 사람은 아파트가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런 점은 오늘날 가난한 사람은 이전의 가난한 사람과는 사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과거에는 가난하면 자산이 아예 없는 경우가 많았으나 오늘날은 가난해도 자산이 많을 수 있다. 아파트와 자동차, 그리고 다른 여러 물품은 모두 자산에 속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으니 바로 자산의 구성이다. 자산은 자기자본 더하기 부채로 이루어진다. 빌라나 아파트, 자동차, 냉장고·세탁기·텔레비전 등의 가전제품, 스마트폰·PC 등의 통신기기 등 다양한 상품들을 생활수단으로 신용 구매하며 지게 된 부채가 자신의 순수입보다 더 많으면 자산이 아무리 많아도 빚밖에 없다는 말, 살기가 팍팍하다는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 노동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부채를 짊어지게 된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일로, 역사적으로 최근의 현상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사회를 지배해온 지난 수백 년 노동자가 빚을 지는 일은 드물었다.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사람에게는 누구도 신용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융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노동자들은 대부분 빚진 상태가 된다. 한국에서 금융화는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으나 1990년대 말의 외환위기로 인해 IMF 구제금융을 받으며 긴축경제가 실시되는 등 신자유주의의 사회 지배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더욱 심화했다. 이전에는 문턱이 높아 접근하기 어렵던 은행이 그때부터 일반 개인과 가계를 상대로 대출을 늘린다. 일각에서 ‘금융의 민주화’로 부르는 그런 조치로 지금 수많은 개인과 가계가 부채로 허덕이고 있고,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자산 효과’라는 말이 있다. 보유한 자산의 가치 또는 가격이 오르면 사람들이 스스로 부자가 되었다고 여기고 소비를 더 많이 하는 현상을 가리킬 때 쓴다. 빚이 많아도 자산은 증가하기 때문에 크게 빚진 사람도 자산 효과를 누리는 경향이 있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면 사회적 불평등은 심화하고, 상층의 극소수는 부유해지는 데 반해서 하층 대다수는 가난해진다. 그런데도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이 부자인 양 행동하며 여간해서는 소비를 줄이지 않거나 줄일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삶의 모습이다.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가 지난 11월 4일 국회에서 그동안 자당이 제안해온 금융투자소득세법을 폐지하려는 정부 여당의 방침에 동의하겠다고 말했다. 1,500만이나 되는 주식투자자의 어려움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그가 제시한 이유라고 한다. 1,500만 명이면 2024년 6월 기준 경제활동인구 2,976만 명의 절반보다 많다. 사람들이 주식에만 투자하는 것도 아니다. 부동산, 펀드, 채권, 외환, 가상화폐 등의 금융자산에 투자하는 사람까지 합치면 1,500만 명을 훨씬 넘어설 것이다. 투자자가 운용하는 자산의 많은 부분은 부채라고 봐야 한다. 2023년 국민대차대조표를 보면 (1975년에는 2.8조 원에 불과하던) 금융자산이 물경 22,899.4조 원으로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놀라운 것은 부채가 그중 21,854.6조 원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지금 여야가 금융투자소득세법을 폐지하겠다는 것은 사람들더러 금융자산 늘리는 일을 계속하라고 부추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1,500만 주식투자자가 금융자산을 늘리는 것은 부채를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부채를 늘리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보면 주식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금융투자소득세법을 폐기하려는 정책은 사람들을 부채의 늪에 빠뜨리려는 심산에서 나온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부채의 늪에 빠져 절망적으로 되면 자살에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한국 사회에서 가계부채가 급증한 시기에 자살률이 급증했다는 사실이 그 점을 말해준다. 여야는 금융투자소득세법 폐지에 합의하면서 그런 점을 염두에 두기는 했을까. 법의 폐지는 주식투자에 몰입하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고 그들이 운용하는 금융자산의 규모를 키울 공산이 크다. 하지만 그럴수록 금융자산에 포함되는 부채의 규모도 커질 것이요, 갈수록 더 많은 부채를 짊어질 사람의 수도 늘어날 것이다. 부채의 늪에 빠지면 자살의 유혹이 가까워질 수 있다. 금투법을 폐지하자는 정부와 여당, 그리고 야당의 제안은 그렇다면 자살을 권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망할 놈의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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