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네가 먹는 것을 말하라, 나는 네가 누군지 말하겠다(Dis-moi ce que tu manges, Je te dirai ce que tu es). 식도락가 사바랭이 한 말이다. 본디 문맥을 이탈해 보편 의미로 번져갔다고 하지만, 틀릴 일이 없는 이야기다.

 

인과에 갇힌 서구 과학 눈으로 보면 먹는 것에 함유된 성분과 그 섭취량을 따져서 끼칠 수 있는 영향 정도를 말해야 한다, 따위로 말하겠지만, 생태학 차원에서 보면 먹는 생명이 먹히는 생명에게서 본성적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도리어 이치에 닿지 않는다. (물론 생태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으나, 우리가 말하는 생태학은 서구 과학의 분석 어법을 넘어서 종합 판단으로 나아가는 범주 인류학적 생태학이다.)

 

단도직입으로 문제의식을 꺼낸다: 냅다 고기-특히 네발 달린- 먹어대는 사람과 딥다 푸성귀 먹어대는 사람은 정말 다른가? 당연하다. 특별한 목적에서 육식과 채식을 일시적으로 증강해 먹는 경우가 아닌 한, 오랫동안 영 다른 음식을 섭취해 온 두 부류 사람이 지니는 심신 성향은 도저히 같을 수가 없다. 우리 생태학 어법으로 이야기해 보자.

 

우선, 먹는 행위 자체에서 이야기를 비롯한다. 가령 두릅을 먹는다고 할 때, 나는 단순히 영양분을 보충한다거나 좋은 맛을 즐긴다는 도구 차원 너머에 있는 근원 진실과 마주한다. 먹는 행위는 한 생명이 다른 생명과 합일하는 사건이다. 합일하는 과정에서 나는 두릅의 목숨을 거둔다. “거둔다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살육이고 다른 하나는 포용이다. 각각 품은 더 깊은 진실로 다가간다.

 

살육은 대뜸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죽여서 먹든 먹어서 죽이든 살육 행위는 불가피하다. 살육하는 순간 살육자는 경건해야 한다. 생명 하나의 단절이 다른 한 생명에게 연속성으로 전이되는 카이로스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육은 제의를 창조한다. 제의임을 깨달은 순간부터 이야기는 쉽지 않아진다. 제의는 숭고하다. 그래서 인간은 제의를 포기한다. 포기한 결과를 오늘 우리가 참혹하게 목격하는 중이다.

 

포용은 알기 쉽지 않은 이야기다. 린 마굴리스 이야기로 출발하자. 단세포 생명 하나가 다른 단세포 생명 하나를 먹는다.” 살육 행위다. 그런데 먹힌 생명이 먹은 생명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단순히 살아남기만 한 게 아니라 먹은 생명과 더불어 전혀 다른 생명으로 도약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린 마굴리스는 이 사건을 내부 공생이라 일컫는다. 내부 공생 사건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두 생명의 성적 결합이 된다. 이렇게 포용은 놀이를 창조한다. 놀이임을 깨달은 순간부터 이야기가 쉬워진다. 놀이는 질탕하다. 그래서 인간은 놀이만을 탐한다. 탐한 결과를 오늘 우리가 참담하게 목격하는 중이다.

 

단순히 이렇게 갈라 정리함으로써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인다. 탐식에 빠지는 인간은 어느 쪽인가? 냅다 고기-특히 네발 달린- 먹어대는 인간인가, 딥다 푸성귀 먹어대는 인간인가? 질문 자체가 실없다. 육식을 탐하는 인간이 일군 문명이 오늘날 인류와 지구생태계를 이 모양으로 망가뜨렸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아도 네 발 달린 동물인데 거기다가 또 동물-특히 네 발 달린-을 대고 먹어대니 네 발 달린 동물 본성이 증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네 발 달린 동물 본성이 무엇인가가 관건이다. 한마디로 자르면 외곬(偏向)”이다. 추우면 따뜻한 곳을 침략하고, 더우면 서늘한 곳을 침략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을 모르는 기생 생명체가 동물-특히 네 발 달린-이다. 침략 외곬 본성을 무한 증강한 직립보행 인간이 만들어낸 지식과 행위체계가 형식논리, 수학 기반 과학·기술, 마침내 제국주의다. 제국주의를 사바랭 어법으로 재구성하면 이렇다: 너는 네가 네 발 달린 고기를 주로 먹는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답한다: 그렇다면 너는 침략 본성을 지닌 제국주의자다.

 

제국주의 역사를 보면 사실임이 드러난다. 울리히 브란트와 마르쿠스 비센이 쓴 제국적 생활양식을 넘어서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제국적 생활양식을 상징하는 아이콘 셋 가운데 하나가 고기(肉類)”. 제국주의 종주국이든 변방 부역국이든 제국적 생활양식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은 육식 인간이다. 그들은 분명히 고기를 먹기 위해 산다. 그렇게 고기를 먹어대야 더욱 제국적 체취를 풍길 수 있다. 그 체취가 제국 시민임을 과시하는 훈장이다.

 

우리는, 물론, 이른바 비건이 아니다. 우리가 고기를 삼가고 푸성귀를 먹는 까닭은 동물권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얼굴 있는 생명은 먹지 않는다는 알량한 종 편견 따위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생명으로서 끝까지 일궈내야 할 팡이실이(hyphaeing)” 흔히 말하는 네트워킹 본성을 따르기 위해서다. 그 본성의 창조자인 곰팡이, 곧 버섯과 그 본성의 현창자인 식물들을 삼가 먹는다. 비건이라고 말하지 않는 까닭은 아주 특별한 경우는 고기를 먹기도 하거니와 그보다는 버섯을 귀히 여겨 받들어 먹기 때문이다. 버섯은 식물이 아니다.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리는 제국의 총아인 육식주의를 버린다. 생명 체계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머리 숙여 엎드려 식물과 버섯과 말을 거룩하고 질탕한 식탁에 모신다. 먹기 전 한 번 되새긴다: 내게 네가 먹는 것을 말하라, 나는 네가 누군지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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