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경강(京江) 걷기는 강동구 천호동, 암사동, 고덕동, 그리고 강일동 일부를 거쳐 가는 동쪽 마지막 구간이다. 광진교 남단에서 떠나 동북쪽으로 강변을 크게 돌아 고덕천 두물머리까지 간 다음, 거기서 꺾어 고덕천을 따라 들어가 강일동 풍경과 살짝 마주치고는 곧바로 상일동역에서 일정을 마무리 하기로 한다. 경강 일곱 구간 중 다섯을 채운다.

 

광진교 남단 한쪽에는 도미(都彌) 부인 동상이 있다. 백제 개로왕이 권력을 이용해 평범한 백성의 옆지기를 빼앗으려 했으나 슬기로운 여인이 잘 대처해 끝내 사랑을 지켜냈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온다고 하니 허구만은 아닐 테지만 신라계 부역 지식인 김부식이 지닌 편견과 무관할 수 없으리라는 합리적 의심을 해 볼 만하다. 도미 부인 이야기만이 아니라 이 일대는 건국 초기부터 백제와 깊숙이 얽혀 있는 곳이다.


 

광진교를 걸어 조금 북쪽으로 나아가다가 이내 강가를 향해 내려가는 길로 접어든다. 물에 바투 낸 호젓한 길을 따라 얼마 가지 못해 길은 드론 공원에 막힌다. 뭍 쪽으로 한참 나와 미루나무 길을 따라간다. 드론 공원 지나면서는 생태 보존 지역이라 더 한참 물을 보지 못한 채 간다. 이윽고 암사 둔치 생태공원이 숲을 열고 물 가까이 닿을 수 있게도 길을 내준다. 작은 습지가 징검돌처럼 놓인 사잇길을 가면서 제 본성 따라 피어난 푸나무며 버섯, 이끼가 목숨 내음을 자욱하게 풍겨낸다. 큰 낭아초 군락 길을 벗어나자, 고개가 시작된다.


 

고갯마루에 이르러보니 바위절터(巖寺址)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숲에서 절 건너뛰던 버릇대로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다 뭔가에 이끌려 되돌아간다. 절터에는 뜻밖에 정자 하나가 떡하니 서 있다. 본디 백제 시대 암사, 또는 백중사(伯仲寺)가 있던 자리에 구암서원을 세웠으며 이를 기려 최근에 구암정을 지었다고 한다. 구암서원은 1667년 건립된 광주군 구천면 최초 서원이다. 이 일대 유생은 여기서 배워 과거에 급제하고 출세할 수 있었으며 노론 집단에 속했다. 백제 흔적을 지우고 신라계 특권층 부역 집단 후예인 서인 노론 근거지를 만들어 오늘날까지 기억하게 하니 참으로 검질긴 매판 흑역사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심사가 울적하다.



 

구암정 현액 글씨는 여초 김응현 작품이다. 그 집안도 노론이다. 놀라울 따름이다.


고개를 내려오는데 온통 어수선하다. 세종포천고속도로라는 뜬금없는 토건 때문이다. 이따위 길 장사가 숲과 물에 무엇을 뜻하는지 아프디아프게 느끼는 나는 마치 무슨 큰 범죄자가 된 듯 형언할 수 없는 감정 상태로 곤두박질친다. 포효하는 자동차 소음까지 덤벼들자 나는 맹렬한 속도로 암사 고개를 벗어난다. 지도로 확인하기도 전에 이미 고덕천 다리 위에 몸이 서 있다. 고덕천 꼬마 두물머리가 얌전하게 콘크리트 단장한 모습으로 내려다보인다. 개울 수준인 시내가 아픈 몸 냄새를 풍기며 끌려 나간다. 양쪽 언덕 위에는 알 수 없는 토건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크게 오른쪽으로 돌자, 내를 건너온 강일동 자락과 마주친다. , 그 강일동···.


 

20여 년 전 나는 강일동에 의료봉사를 온 적이 있다.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1967년 흥인동·서부이촌동 철거민과 1968년 창신동·숭인동 이재민이 쫓겨와 정착한 곳이라 들었다. 좁고 꼬불거리는 골목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은 내가 10대를 살았던 동소문동 산동네와 비슷한 냄새를 풍겼다. 동사무소 공간에 진료소를 차리고 하루에 250명 정도를 무료 진료했다. 정말 가난한 곳이라 계속 봉사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적잖은 부자들이 그랜저를 타고 와 진료받고 약 받아 가는 바람에 분노한 회원들 반대로 전격 중단하고 말았다.

 

그 강일동이 지금은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이른바 강남 따라하기”(탈성장 도시와 에너지 전환중 이상헌이 쓴 <한국의 탈성장 도시 이데올로기형성을 위한 개념적 고찰> 197) 전형에 해당한다. 옛 강일동 주민 대부분이 지금 그 아파트에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알 수 없다. 마치 구암정에 자리 빼앗겨 암사라는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백중사와 같다.

 

강일동 최북단, 한강과 가장 가까운 마을 가래여울은 옛 모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여기는 백제가 전략적 요충지로 삼은 중요한 곳이었다. 지금은 서울양양고속도로가 막아 철저한 고립 상태다. 부역·독재 세력이 자주·민주 세력을 빨갱이로 모는 일과 맥락이 같다. 일정을 마무리하러 지하철역 쪽 대로로 들어선다. 물 잡아먹는 불귀신 토건 괴물이 앞을 가로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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