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이 목마름 절정긴가 한다. 아마도 머지않아 끝날 테고. 단골 백반집에서 소주 두 병을 비우고 허든허든 집으로 간다. 막 씻으려 하는 차에 스마트폰이 부르르 떤다. 심욱보다: 선생님, 고동민이 왔어요! 그래 쌍차 고동민. 가온 아빠. 김정우네 <상도포차>에 있다니 가야지, 하고 서둘러 도로 집 나와 마을버스를 탄다. 떠들썩하다. 들어가니 얼싸안고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난다. 모르는 얼굴조차 반가워 이름을 물어보는 찰나 수십 년 동지가 된다. 익히 아는 사람한테 더 가까이 아는 사람 안부를 물으면서도 뭐가 잘못됐는지 모른다. 가까스로 고동민한테 와락 조은영 안부를 묻고, 주강이와 이창근 소식을 듣는다. 그렇게 왁자한 시간이 살 같이 흐르는가 하더니 나는 이미 내 방에 누워 있다. 숙취가 먼저 일어나 알람 제쳐 놓고 나부터 깨운다. 고동민도 심욱보도 사라진 새벽, 타는 목마름 넘어, 살피재 넘어 나는 한의원으로 향한다.

 

지하철에서 어제 기억을 더듬는다. 잘못 누른 딸랑 한 컷 사진이 불러오는 인연을 올올이 떠올리며 아픈 그리움을 피워낸다. 2009년 일거에 전 노동자 36%3,000명을 해고한 쌍용자동차 협잡, 거기에 항거하는 노동자들을 때려잡은 이명박 폭정은 노동 역사에 길이 남을 일대 사건이었다. 30명도 넘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보다 더 많은 공동체적 삶이 파괴당했으나 권력은 여전히 마지막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 나는 당시 그들을 돌봤던 정신과 의사 정혜신에게 트위터로 연락해 알량하나마 곁에 있을 자리를 구했다. 집단상담 끝낸 노동자와 가족에게 침 치료를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개별 상담을 하며 가장자리를 지켰다. 그들이 대한문에 있을 때, 부산 한진 김진숙을 향해 갈 때, 길거리에서 침을 놓으며 서성거렸다. 얼만큼 큰일이 마무리될 즈음 본래도 없던 이름이지만 끝내 이름 없이 그들 곁에서 나는 사라졌다.


 

가끔 그들 가운데 나를 찾는 이가 없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따금 김정우의 <상도포차>나 페이스북 앞을 지나치거나, 김득중·김정욱의 트위터를 만날 뿐 마주칠 일이 없었다. 오늘 다시 그들 중 몇 사람, 그들 곁에 있었던 벗들 몇과 재회하면서 정색하고 다시 내 삶 한 자락을 되돌아본다. 나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내게 누구였을까. 문득 얼마 전 작고한 홍세화 선생을 떠올린다. 그가 한겨레신문과 마지막 인터뷰한 기사를 읽다가 받은 충격 때문이다. 홍 선생이 진보 또는 좌파의 길에 고결이란 표현을 헌정했다. 정직하게 말한다. 나는 바로 그 대목에서 진보 또는 좌파가 이래서 망하는구나, 탄식했다. 고결이라니. 대체 이 중첩 식민지에 몸 섞어 살면서 차마 누가 고결을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고결한 사람은 이미 살해당했다는 프리모 레비의 고백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살아남은 모든 자는 저염(低染)하다.

 

나는 쌍차 해고 노동자가 스스로 고결을 추구했는지 알지 못한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적어도 나는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적어도 나는 저염하다, . 물론 내가 쌍차 해고 노동자만큼 탄압받지 않았으며, 홍 선생처럼도 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 저염의 근거다. 그러나 내 저염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이 땅에 대체 얼마나 있겠는가. 나는 이 정직한 고백에서 비롯하지 않는 모든 진보 또는 좌파를 인정하지 않는다. 더 넓게, 이른바 순수를 떠드는 예술, 과학, 문화계 명망가를 인정하지 않는다. 고결과 순수는 제국주의, 더군다나 그 식민지에서라면 오직 특권층 부역일 따름이다. 아직 숙취에서 덜 깨어난 탓에 내 말이 과할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분명히 하건대 내가 멀쩡한 정신일 때에도 이 말은 취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순간에도 내 몸에서 배어나는 부역자 악취를 맡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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