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여정이 멈추었던 여의나루역으로 간다. 여의도 구역 한강 둔치를 마저 걷고 샛강 지나 당산동과 양평2동 구역 한강과 한강-안양천 두물머리 둔치를 적당히(!) 걸을 예정이다. 안양천을 따라 얼마나 걸을지 잘 모르지만, 아직 온전히 가시지 않은 요통이 신호를 울리면 이내 걸음을 멈추기로 한다. 걷기를 중단할 수는 없지만 무리해서는 안 된다. 백세시대 운운하는 마케팅 서사와 무관하게 나는 이미 늙어가니 말이다.
여의도에서 선유도 맞은편 강변까지 물 가까이 난 오솔길이 호젓하다. 대개는 그 안쪽 편한 포장도로를 걷거나 자전거로 달리지만 나는 애써 그 오솔길을 찾는다. 물과 마주하고 가 닿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 길은 낚시꾼이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웬만한 사람들 눈에는 띄지도 않는 외진 곳곳에 낚싯대를 걸쳐 놓은 낚시꾼이 앉아 있을 수 있겠나. 그 오솔길은 끊일 듯하면서도 대개 이어져 있다. 걷는 내내 엄밀한 희락이 넘실거린다. 게다가 봐도 봐도 물리지 않는 버드나무가 끝도 없이 나타나 내 나무 본성과 물 본성에 맞장구를 쳐주니 오길 잘했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장마철이라 수량이 늘어나 살짝 물에 잠긴 길을 걸을 때는 찰방찰방 물소리가 난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지낸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비 그친 웅덩이에 일부러 빠져 그 속에 담긴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망가뜨리는 재미를 만끽하곤 했다. 이 재미가 그리도 깨소금 맛인 까닭이 있다. 실은 웅덩이 속 하늘에 빠져 떨어지면 죽는다고 놀린 마을 어른 말씀이 끌고 온 공포심을 다 떨쳐내지 못한 채 딴에는 도전이라고 여기며 덤볐기 때문이다. 떨어져 죽기는커녕 무서운 그 하늘을 도리어 내가 부숴버리지 않았는가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이없음을 알아차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추억이 하찮지는 않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평생을 두고 이런 서사의 나선 순환을 거치며 자라고 깨달아간다. 거짓말이라 하든, 속담이라 하든, 격언이라 하든, 율법이라 하든, 심지어 진리라 하더라도 그 서사에는 이른바 과학이 자랑하는 수학적·인과론적 지평 바깥, 또는 너머 무엇이 반드시 포함된다. 제국주의 초기는 물론 지금도 무지한 제국 시민과 그 부역자는 이런 진실을 “인류학” 개념으로 단순화·극단화해서 핍박하고 살해하는 판이다.
아무리 최첨단 과학과 그 기술을 구가하면서 살아도 인간은 무지(어리석음)와 공포, 그리고 탐심에서 배어 나오는 주술 의존 본성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다. 첨단 과학기술이 빚어낸 작품인 최고급 자동차를 산 어떤 부자가 무사고를 기원하며 타이어에 막걸리 뿌리는 행동이 그리 기이하게 여겨지지 않는 정서를 대개는 공유한다. 유럽 0.1% 최상위 지배층의 100%가 주술을 숭배한다. 그 주술에는 시온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이 포함된다. 이들은 모두 유럽 민속 인식 체계에 속한다. 과학으로 주술을 타파한다는 거짓말은 제국주의 기만전술이다. 아니, 투사 음모다. 이게 진실이다.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 (부부)가 주술 통치를 한다고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 일급 지식인이 드디어 나왔으나, 파장은 크지 않을 듯하다. 당사자는 물론 지식인 권력 핵심에 있는 자들이 모두 그 주술에 중독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정치적 일급 담론 반열에 올릴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러려면 주술 개념을 근원적으로 재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 모든 미신은 주술을 구사하지만, 모든 주술이 미신이지는 않다는 진실부터 드러내야 한다. 미신적 주술은 주술의 힘을 인과 법칙처럼 속이는 거짓말에 담는다. 그래서 가짜다. 참 주술은 그 힘을 비, 아니 초 인과적 네트워킹, 그 동시성에 둔다. 그래서 진짜다.
더욱 중요한 분기점은 주술 개념이 현실화하는 사회적 과정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가짜 주술은 사적 이득을 추구하는 배타적·일방적 지향을 고수한다. 진짜 주술은 공동체 전체 안녕을 추구하는 호혜적·쌍방적 지향으로 번져간다. 가짜 주술은 제국주의가 이성과 역사와 과학의 이름으로 만들어낸 착취·살해용 경전이다. 진짜 주술은 제국주의가 “인류”로 몰아버린 범주 인류가 함께 만들어낸 공존·공생용 합의문이다.
성산대교 가까이서부터 길은 아연 살풍경이 된다. 자전거 도로 바깥, 그러니까 강 가까운 수직 벽 쪽으로 놓인 보행자 도로가 공포를 자아낸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과속하다 사고를 낼까 봐 이렇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보행자 도로를 수직 벽 끝 쪽으로 배치한 일은 수긍이 잘 가지 않는다. 이런 살풍경은 안양천과 두물머리를 이루는 곳까지 쭉 계속된다. 보행자로서 내가 느낀 공포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태까지 강물을 걸으면서 일관되게 지녔던 느낌의 연장이다. 인간과 자연을 이간하고, 시공자나 소유자 편의 위주로 무례하게 자행한 토건 풍경에 대한 분노 말이다.
이런 토건과 가짜 주술은 본성이 같다. 부역 권력이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집어던지는 가짜 주술은 얼마나 물과 사람 위를 휘저으며 내달리는 콘크리트 길을 닮았는가. 두물머리 돌아 안양천으로 접어들 때는 마침내 그동안 밑으로 지나온 아홉 개의 다리, 올림픽대로, 아찔한 램프(ramp)들이 나뿐 아니라 강물도 제압해 버리는 거대한 다족류 괴물로 상상된다. 중랑천에 비해 폭은 좁지만 깊어서 유유해 보이는 안양천이 마치 주눅 들어 괴괴히 흐르는 듯하다. 안양천을 1km도 채 걷지 못한 상태에서 걷기를 중단하고 벌벌 떨며 양평교를 건너 신목동역으로 간다. 아무래도 더 걸으면 안 되겠다, 오늘은.
크게 아쉽지는 않다. 주술과 토건 이야기가 갈마들며 속을 흔들었지만, 어차피 반제국주의 전선에서 마주쳐야 할 일과 마주쳤고 도리어 더 넓혀야 할 지평 한 자락을 보았으니 고맙다. 아내와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매혹적인 버드나무 오솔길을 걷어 물 모심도 했으니 더 고맙다. 지하철로 이동해 광화문 와서 바다 이야기를 담은 책 하나 품은 뒤 교보 뒤 한적한 거리공원에 앉아 무료를 즐긴다. 안 하던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