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오월 안성 저수지 물멍을 스승의 날 선물로 준 제자가 오늘은 괴산 산막이옛길 물멍에 초대한다며 이른 아침 왔다. 아직 물 제의 커다란 얼개 넘어 세부 일정을 잡지 못한 나로서는 잠시 틈내는 일이 오히려 길잡이 노릇할 수도 있다 싶어 냉큼 따라나섰다.
예상보다 쾌청한 날이다. 큰길을 달려 먼 데로 나아가는 일은 그때마다 설레고 모든 게 궁금하다. 차 안에서, 지난 두 일요일에 걸었던 두물머리와 더 물머리를 이야기한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제국주의로 흘러간다. 두물머리 수인·해월은 그대로 더 물머리 나다.
제자는 수긍과 질문과 탄식과 분노를 넘나들며 대화에 참여한다. 어디를 지나왔는지 통 알 수 없는 채로 어느덧 목적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미 사람들로 붐빈다. 열 시 좀 넘었는데 벌써 먹으며 왜자기는 사람들로 들머리부터 어수선하다. 여기라고 어찌 예욀쏘냐.
산막이옛길은 옛길이라는 표현이 주는 느낌보다는 젊다. 해방 직후 어려워진 전력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세운 괴산댐 때문에 본디 옛길이 수몰되자 산막이마을 주민이 새로 만들었으니 칠십 년도 채 안 된다. 세월 따라다니지는 않아서 길 풍경은 저 스스로 좋다.
우리는 무심코 들어가다가 지도에 나오는 산막이옛길 아닌 강가 길로 방향을 바꾼다. 둘레길처럼 새로 닦지 않았나 싶다. 강물에 바짝 붙은 경로가 제법 극적이다. 발은 땅을 더듬지만 눈은 연신 물을 쓸고 지나간다. 아, 인제야 보니 숲이 물빛을 닮아 푸르구나.
사람이 많아 북새통을 이루건 말건 나는 곡진히 물을 숨 쉰다. 단 한 군데만이라도 물을 만질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워한다. 현실성 없는 생각인 꼭 그만큼 인간이 물 자연을 멀리해서 영성 없는 껍데기 생명으로 타락했다는 증거다. 똑 그렇다.
이 길을 걷는 허구한 사람들이 정말 숲을 찾아온 걸까. 파괴되는 숲을 애도하며 기리는 걸까. 저들이 알고 걷는 뭍 숲이 물 숲에서 올라왔다는 진실을 알기는 하는 걸까. 물 숲, 그러니까 강과 바다 파괴가 근원적이며 절대적인 범죄라는 진실을 짐작이나 하는 걸까.
물 옆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그 길로 되돌아온다. 본디 그 옛길로 이어지므로 한 바퀴 돌 수 있지만, 차가 지나가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발과 눈을 꼭꼭 다져 물과 숲을 이어주면서 10km 남짓 제의와 놀이를 가로질러 한바탕 휘휘 저어 나온다.
이 강은 달천(疸川: 달래강)이다. 남한강에 속하는 한 지류다. 충주로 달려가 원 줄기와 만나면 여주를 거쳐 이내 두물머리에 닿는다. 두물머리 기세로 우당탕 서울을 가로지른 다음 세 물머리, 네 물머리로 한껏 농익은 몸은 마침내 백호 서해와 한 몸을 이룬다.
나는 상상한다: 남한강 물길 따라 평창·영월·원주·양평으로 번져간 수인·해월의 물 사상운동은 그들이 살해당하지 않았다면 마침내 바다로 나아갔으리라. 반제 통일전선 헌걸찬 선봉이자 본진으로 만방의 수탈·살해당한 생명과 비생명을 품어 안는 어미가 됐으리라.
요석(운향)·원효의 바리(화쟁) 사상운동과 더불어 수인·해월의 물 사상운동은 이제 패자 팡이실이를 마지막으로 불러낸다. 패자만이 팡이실이를 실행할 수 있고 팡이실이만이 승자 필멸 진리를 증명할 수 있다. 바로 이제가 승자 제국주의 필멸을 당겨올 카이로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