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은빛 풍뎅이가 홀연히 날아들기에 가볍게 붙잡는다. 붙잡는 순간 황금빛으로 바뀐다. 그 경이로움을 옆 사람에게 전한다. 꿈에서 깬다. 일어나 앉아 생각에 잠긴다. 카를 구스타프 융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황금풍뎅이 일화를 기억하는 데다가 요즘 그의 어록을 심심치 않게 마주해서 일어난 꿈 작용이라고 일단 이성적·합리적 해석부터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황금풍뎅이는 본 적이 없다. 어릴 적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본 풍뎅이는 검푸른 빛이었다고 기억한다. 나는 워낙 식물적인 사람이라 물방개, 몇몇 민물고기, 알 품은 새 둥지 따위를 빼곤 동물과 관련한 각별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풍뎅이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동시성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글을 읽던 중 카를 구스타프 융 일화와 마주쳐 새로운 인상으로 각인된 듯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그 꿈 서사를 단순하게 구성하는 일은 동시성을 대하는 내 태도는 물론 동시성 자체에 모독이 된다.

 

이 꿈만으로 완결된 메시지가 있을까, 곰곰 묻는다. 당최 어떤 심상 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통속한 길몽이라 여기기에는 내가 너무 냉정한 무당이다. 요즘 내가 화두 삼은 문제와 연결해 생각을 이어가다가 Irena Buzarewicz 트위터 그림과 돌연 마주친다.


 

거기 Ego 대신 인간, Nature 대신 인류를 집어넣으면 요즘 내가 드러내려 애쓰는 범주 인류학구도를 시각적으로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오른쪽 사람 색마저 검게 해야겠지만 어쨌든) 그 구도에서라면 인류는 다른 생명체와 다를 바가 없고, 따라서 범주 인류학의 공동 주체인 다른 생명체와 소통(해야 )한다. 그게 자연 이치며, 지구생태계 본성이다. 문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 인류가 그러니까 풍뎅이와 소통할 수 있느냐다. 늘 여기서 멈춘다. 자리에서 일어나 탕전실로 간다. 바깥으로 난 창문 통해 하늘을 볼 수 있어 생각이 어지럽거나 멈출 때 찾곤 한다. 창밖으로 나가던 눈길이 무심히 한곳에 머문다. 바로 거기서

 


황금무당벌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와 내 손등에 앉는다. 황금풍뎅이는커녕 평범 풍뎅이조차 전혀 볼 수 없는 서울 한복판에서라면야 황금 무당벌레야말로 범주 인류학 팡이실이 전령으로 충분하게 감동적이고 충만하게 경이롭지 않은가. 황금 무당벌레가 이내 날아가고 없는 허공 향해 나는 깊이 허리를 접는다. 더는 꿈을 해석할 까닭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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