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과 백악산 사이, 그러니까 정릉동에서 평창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옛 이름이 보토현(補土峴)이었다. 보토현(補土峴)은 백두대간에서 한북정맥으로 갈라져 조선 한양성 주산인 백악산으로 오는 주맥 가운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으로 파악되었다.
고개는 보통 두 산 사이 가장 낮은 곳이라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 조선 왕실 기록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빗물에 씻기고 헐려 땅 기운 옹근 곳이 떨어져 나갔다. 그 땅에 흙을 채워 넣어야 한다고 비변사에서 아뢰었다(정조 8년). 그래서 여기가 보토현이 되었다. 보토현 관리를 맡은 보토처(補土處)가 총융청 산하에 있었다.
나는 이런 역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2023년 6월 4일 북한산과 백악산 사이 자락에서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제의를 실행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야기 배경을 이렇게 적었다.
“북한산과 백악산 경계, 동쪽 정릉동과 서쪽 평창동 사이에는 본디 고갯길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지금처럼 북한산 둘레길 제5구간 명상길 일부와 겹치는 길이 아니라, 청학사와 현재 평창동 형제봉 통제소를 잇는 최단구간 고갯길을 상상해 보았다.” (2023.6.6. <북한산과 백악산 사이>)
물론 내가 상상한 고갯길과 실제 보토현은 같을 수 없다. 내 상상은 등고선 지도를 보며 찾아낸-청학사와 형제봉 통제소를 직선으로 이은-가장 낮고 짧은 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상상 속 장소를 찾아 나선다. 작년 내 제의와 보토현 역사적 서사를 한 데 묶기 위해서다. 작년과 전혀 다른 경로를 따라 들어가 청학사와 여래사를 잇는 익숙한 길에 다다랐다. 여기서 갈라져 삼곡사 쪽으로 간다. 작은 골짜기지만 영검을 구한 흔적들로 가득 차 있다. 마애불이든 산신이든 보토현 풍수 서사에 기댄 갈망을 결집한 표지들은 여전히 여기를 떠나지 않고 웅얼거린다. 맞은편 평창동으로 내려가는 골짜기도 마찬가지다. 비나리와 징 두드리는 소리가 언제든 들려올 듯하다.
지도에서 확인한 ‘내’ 보토현을 정확히 찾아낸다. 북한산 청담 계곡에서 담아온(2023.10.29.) 흙을 골짜기 양쪽으로 뿌려 보토현 서사가 오늘에 살아 있도록 제의를 실행한다. 구진봉(俱盡峰) 쪽으로 직진하다가 길이 군부대 철조망으로 막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되돌아온다. 못내 아쉬운 마음이 한순간 사라진다. 아까 그 제의 자리 조금 지나서 내 눈에 길 한가운데 파헤쳐진 구덩이와 나뒹구는 흙더미가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누가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선명한 삽 자국이 있는 사실로 미루어 작정하고 한 짓임이 틀림없다. 길 한가운데라 귀한 약초나 보석 따위가 있었을 리 없으니 내게는 다만 보토현 서사를 훼손한 짓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흩어진 나머지 흙을 다시 모으고 도둑맞은 흙 대신 인근 나무토막들로 덮는다. 온전히 복원하지 못해 아쉽지만, 오늘 여기로 와야 했던 이유가 분명해져 내가 요즘 깊이 주의를 기울이는 범주 인류학적 언어와 실천 탐구에 숲이 보내는 응원이라 여긴다.
백악산 동북쪽에서 시작해 북한산을 거쳐 다시 경복궁과 청와대가 자리한 백악산 서남쪽으로 향한다. 보토현 서사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북한산 흙을 백악산에 삼가 보탠 다음 정화를 전제로 축원 올린다. 가벼운 발걸음이 삼청동 쪽 숲길 끄트머리쯤에서 멈춘다. 숲속에서 유유히 푸른 잎을 먹고 있는 꽃사슴이 보였기 때문이다.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희화화했듯 청와대를 우스개로 만든 부역 주술 통치에 아랑곳하지 않고 백악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느껴져 뭉클하다.
배고픔과 목마름이 몰려와 총총히 숲을 나온다. 인공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는다는 삼청동 어느 두부 전문점으로 들어간다. 막걸리부터 시켜 벌컥벌컥 들이켠다. 낮술이라 할 만한 시간대인지라 취기가 날렵하게 퍼진다. 오늘 남은 시간일랑 그냥 흘러가는 대로 보낼 수 있으니 뭐 대취한들 어떤가, 아내와 딸아이가 함께 여행을 떠나서 저녁 약속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