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 동안 줄기차게 해온 숲 걷기를 톺아볼 때마다 아뜩해진다. 아니 할 말로 ‘죽으려고 용을 쓴’ 짓 같으니 말이다. 아이젠, 스틱은 차치하고라도 기본인 등산화조차 신지 않은 평상복 차림으로 혼자서 서울 안팎 산 쉰여 개를 드나들었다. 그 가운데 절반 이상(27개)이 200m 넘는, 그러니까 언제든 다치고 죽을 수 있는 산이었다. 아주 여러 번 길 아닌 곳으로 들어가 헤맸고, 길을 따라가다가 잃었는데, 위험천만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디보다 아찔했던 곳은 도봉산 회룡천 골짜기였다. 첫 번째는 눈 덮인 날 오르다가 길을 잃고 헤맨 끝에 결국 실패했는데 생각할수록 오금이 저린다. 두 번째는 처음부터 길 없는 숲으로 작정하고 들어가 내려가는 과정에서 세 번이나 수직 벼랑에서 굴러떨어지며 폭포 위 암벽 위를 생사 걸어 오른 끝에 결국 성공했는데 생각할 때마다 내몰고 받아준 손길이 느껴져 소름 돋는다. 내가 헤맨 모든 숲은 물론 골짜기였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다.
숲 걷기 초반에는 의식하지 못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스스로 등성이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눈이 열렸다. 무엇보다 거긴 물이 없기 때문이다. 물소리를 들을 수도, 물을 만질 수도 없다. 게다가 물기운이 있어야 사는 생명들을 볼 수 없다. ‘등산’ 아니라 소통하러 숲 걷기 하는 내게는 등성이 아닌 골짜기가 똑 꼭 맞는다. 더군다나 나는 버드나무 화신이 아니던가.^^ 물길 이루지 못한 습지만 있어도 나는 아이처럼 좋아하며 걸었다.
그렇게 물기운에 배어든 나는 마침내 커다란 전환점을 맞는다: 이제부터는 숲에서 물을 볼 게 아니라 물에서 숲을 보면 어떨까. 더 굵은 내를 만들고 기어이 큰 강을 이루는 물을 따라가며 숲을 바라보다 보면 마침내 바다에 이르지 않겠나. 본디 숲은 바다니까 바다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어디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는 모른다. 물은 숲처럼 곧장 들어갈 수도 없으니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도 모른다. 발길을 돌릴 때가 왔다는 느낌뿐이다.
마침 이때! 양극성장애에 육박하는 우울장애로 숙의 치유를 했던 분이 스승의날 선물로 물멍을 준비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일요일 아침 일찍 직접 차를 집 앞으로 몰고 와 나를 태우고 경기도 안성 금광저수지로 갔다. 저수지 가장자리를 따라 물 위에 낸 길을 천천히 걸으며 “물에서 숲을 바라다보는” 꿈을 이루게 해주었다. 첫걸음을 이리 예상치도 못하게 내디디도록 이끈 생명 팡이실이, 누가 어떻게 이해하든 오해하든 내게는 경이 그 자체다.
꾀꼬리 청아한 노랫소리, 살랑이는 실바람, 그 바람에 까르르 웃는 사시나무잎들, 도시에서 보기 어려운 연보라 오동나무꽃, 거울 같은 수면에 어린 산 그림자, 그 산 그림자를 흔들며 유유히 떠가는 쪽배 한 척··· 스며드는 물기운이 영혼을 정화하고 배어드는 숲 기운이 육신을 보양하니 신선이 따로 없다. 마지막 들른 미산저수지. 언덕에서 물을 내려다보는데 물 한가운데서 언덕을 올려다보는 내 모습이 찰나적 환영으로 떠오른다. 어이쿠,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