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계획은 없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서면서 간단한 느낌 하나로 행로를 정한다: 버스 타기 싫다. 나는 걸어서 바리메 숲길로 들어선다. 출근길에는 택하지 않는 외딴길을 따라간다. 천천히 걷다 보니 전에 없던 음성이 들려온다. 유아 숲 체험장이라고 하지만 노인들만 득실대는 공간에서 꽤 나이 든 버드나무와 회화나무가 부르는 소리다. 버드나무가 좀 더 오래돼 보인다. 밑동이 비어간다. 건강을 빌며 천천히 돌아 나와 생태 다리를 건넌다.
물론 여기도 아주 익숙한 길이지만 영 다른 음성을 듣는다. 단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는데 눈에 띄자마자 그 이름을 직감한다. 섬밀하게 관찰하며 이미 시드는 중인 꽃들을 가려 사진에 담는다. 친절하게도 나무가 사람 음성을 빌어서 내 직감이 맞았음을 확인해 준다. “오매, 여그 탱자나무요이?” 남도 사투리를 쓰는 장년 부부가 지나가면서 커다란 소리로 말한다. 황매 흐드러진 언덕을 돌아 애기똥풀 지천인 비탈에 이르자 꽝 벼락이 떨어진다.
“작은 산은 있어도 작은 숲은 없다.”
산은 울멍줄멍 올망졸망 차이 나지만 숲은 팡이실이 거대한 전체로서 하나다. 인간만이 이 진실을 모른다. 작은 산자락 작지 않은 숲을 업신여겨 거침없이 파괴한 현장을 보는 일은 이제 진부한 일상이다. 살피재 가까운 숲에서 그 꼴을 본다. 관목이지만 교목 수준으로 자라 깊은 그늘 거느린 사철나무 군락 일각이 무참히 무너져 있다. 왜 이 짓을 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주위 집 몇 채가 헐린 것으로 보아, 뭔 토건 질을 또 벌일 모양이다.
그 너머 까치 능선 기슭에서도 아픈 광경 앞에 다시 서고 만다. 수관 절반이 톱에 잘려 생명력을 빼앗긴 싸리나무 노거수가 심지어 꺾여 있기까지 하다. 누가 왜 어떻게 꺾었는지 정말 모르겠다. 슬프고 분한 마음 끌어안고 마지막으로 물 한줄기 부어드린다. 다행히도 그 뿌리 근처에 후계목이 자라고 있다. 제발 이 아이만큼은 손대지 말아 주기를 기도한다. 그런데 어쩌나, 인간이 지나다니는 길가다. ‘작은’ 놈이 걸리적거리면 가차 없겠지.
“죽은 이는 있어도 없는 이는 없다.”
더 깊은 쪽으로 들어간다. 맨발 걷기 하는 인간 소음이 새소리를 밀어낸 숲은 더 이상 푸르지 않다; 파리하다. 나는 서둘러 거기를 벗어난다. 기억을 좇아 연달래(철쭉) 울창했던 기슭으로 간다. 비 온 뒤라 연달래는 대부분 뭉그러지고 떨어져 누웠다. 다가가 보니 낙화가 더 곱다. 처연함이 싱싱함을 넘는다. 자동차 소음에 닿기 직전 돌아선다. 내가 죽은 청년 하나를 위하여 통곡하던 숲으로 간다. 그는 똑 거기 있다. 죽은 이가 산 이를 건넌다.
숲은 죽은 존재와 죽은 존재로 여겨지는 존재를 모두 품은 큰 존재다. 외연이 커서 크지 않고 작디작게 배어드는 내포가 커서 크다. 그렇게 크기 때문에, 인간은 숲을 함부로 죽이고 그래서 죽은 존재로 여긴다. 그러나 죽은 존재는 없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맡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는 엄밀 존재로 어디에나 있다. 나는 숲에서 그렇게 엄밀하게 보고 듣고 맡고 만지는 사건으로 열린다. 유심히 없어져서 무심히 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