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숙취에서 아직 덜 깨어 요즘 걷기는 80%가량만 한다. 오늘은 청룡산. 서울대입구역에서 서울대로 넘어가는 길 오른쪽에 있는 160m 높이 낮은 산이다. 강감찬 장군이 지나다 울창한 숲을 보고 능 자리로 좋겠다고 하여 청릉산(靑陵山)이라 했다는 설화가 전해 온다. 개발에 밀려 사라졌지만 실제로 능과 능말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청릉산은 두음법칙과 어긋나게 청능산이라 불렸다. 정능(精能)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는데 이와 혼용하면서 일어난 변화라고 추정할 만하다. 청룡이라는 이름은 6~70년대 개발 업자가 어감이 좋다며 붙인 이래 지금은 어엿한 역사가 되었다. 봉천동 행정동 가운데 하나로 청룡동도 자리 잡은 상태라 이대로 굳어지지 싶다.

 

저 설화와 역사를 찢고 나는 오늘, 이 산에 내 청룡을 모셔 영산으로 만든다. 걷기와 목부 심기로 이 산에 개벽 기운을 불어넣는다. 먼저 골짝 물기운을 찾는다. 자그만 물 용, 그러니까 도롱뇽이 태동하는 청정한 못가에 선다. 그래. 신화가 가공한 용이 아니라 여기 살아 꿈틀거리는 도롱뇽, 소미한 생명체가 이 숲과 반도와 지구를 정화하고 새 생명 운동을 일으킬 신성한 청룡이다. 미르()버들 한 가지를 샘이 발원한 언저리에 심는다. 골짝을 중심으로 이리저리 돌고 능선을 넘나들면서 숲 품 모두를 숨에 품는다. 산마루 가까이 한 나무 꼭대기에 까치가 정성 다해 둥지 짓는 광경을 지켜보다 그 나무뿌리 곁에 버드나무(Korean Willow) 한 가지를 심는다.


 

이제 이 나지막해서 큰 산은 참 청룡산이 됐다. 내 제의적 발걸음은 이 정한 물기운이 미르 형상으로 꾸민 사악한 불 짐승 두 마리 잡아 그 목숨을 거두리라는 소식 하나 품고 내일로 나아간다. 인과를 뚫고 합리를 허무는 이 인류학적 행동은 제국 지성소를 정조준한다. 제국 지성소에는 제 악을 인류학적 인류에게 뒤집어씌운 찐 악마 인류가 돈에 취해 뒹군다. 그 찐 악마 인류를 파동 타격하는 힘()은 힘()이 아니다_우치다 타츠루(內田 樹). 소식이다. 팡이실이다. 팡이실이 아닌 인과·합리로써는 제국과 부역 패거리를 해체할 수 없다. 죽임당한 참 인류가 지어내는 패자 팡이실이, 그 공생 운동으로써만 찐 악마 인류목숨을 거두어 거둘 수 있다.

 

참 인류는 숲에서 발원했다. 나무에직립 본성을 배웠다. 곰팡이한테서 팡이실이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그러므로 인류는 인류 힘만으로 제국을 넘어가지 못한다. 인류 그 너머 생명과 비생명 모두와 더불어 어깨동무해야만 한다. 청룡산을 나서며 되돌아본다. 얼마나 나지막한지. 그나마 청릉산이라는 이름조차 부지하지 못하고 개발 업자한테 호적을 넘겨준 내력은 또 얼마나 구차한지. 인간이 인간 시선으로, 인간 언어로 조져 놓은 세상을 떠메고 가는 숲은 그러나 묵묵하다. 언제 다시 이 숲과 만날지 나는 모른다. 몰라도 아는 진실은 만나지 않는다는 말과 서로 고립된다는 말은 같지 않다는 초인과·초합리. 여낙낙한 봄바람으로 배웅하는 숲에 두 손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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