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걷기 심취가 몸에 새겨준 법인(法印)은 중둔근 극통 말고도 더 있다: 발가락, 특히 오른쪽 모든 발가락 끄트머리에 박힌 피멍과 굳은살. 전문가 조언을 따라 발 길이보다 2cm 더 큰 기능성 운동화를 신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은 이 심취가 얼마나 신랄했는지 웅변한다. 곡진하게 씻고 어루만지고 다독였다. 죽어 몸을 태워야 나오는 선객 사리를 나는 살아서 통렬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 약동하는 표치(標幟). 표치로서 한 소식을 인정하고 다음 구비로 넘어간다. 그래서 오늘은 미도산(味到山)을 음미도달(吟味到達) 하기로 한다. !


 

서울 성모병원과 미도아파트 사이 소로를 따라가다가 급경사를 이루는 작은 산마루에 오르면 이내 평평한 산책로가 나타난다. 남북 방향으로 난 이 길을 곧장 걸어 올라 정상에 이르면 동서 방향으로 난 능선길로 갈라져 내려간다. 더 나아갈 수 없는 정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있다. 동쪽 길은 서울법원종합청사, 서쪽 길은 대검찰청과 대법원으로 가는 서초동 누에 다리에 이른다. 누에 다리 건너서 몽마르트르 공원에서 효령대군 묘, 그리고 매봉재산까지 이으면 우면산을 타고 관악산과 맞닿으니 크게 보아 그 줄기에 속한다.


 

간선에 해당하는 이 T자형 길 말고 걷는 맛 좋은 길이 둘 더 있다. 동쪽 미도아파트 가까이에는 오종종한 소나무 숲을 돌아 완만히 올라가는 비탈길이 있다. 서쪽 서울 성모병원 별관 가까이에는 백양나무, 물오리나무들이 어우러진 부드러운 자락길이 있다. 양쪽 다 날카로운 골로 갈라지지 않아서 물기를 고루 나누어 머금는데 서쪽이 훨씬 더 그렇다. 버섯이 놀랄 만큼 많은 까닭에 내가 오래 머물곤 하는 곳이다. 작은 산이라 이런 면모를 유지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다른 산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풍경이다. 음미해서 도달한 진실이다.


 

미도산을 이렇게 걷기는 처음이다. 그동안 아주 여러 번 걸었지만, 숲 전체와 버섯 개체를 동시에 챙기지 못했다. 인연은 그때그때 깜냥대로 이루어지고, 그 인연이 제의도 전선도 품으니 아마도 제대로 된 제의와 전선은 이제부터일 테다. 깨달음은 이치상 언제나 나중에 오는 법. 이렇게 느지막이 나지막이 미도산에 도착하는 일은 처음부터 팡이실이 발 음모가 개입돼 있었음이 틀림없다. 음모는 진리의 본성이다.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역사는 짝퉁 음모에 걸려 살해당한 기록으로 영락했다. 기록 이름이 제국주의다. 이제 나는 그 이름과 싸운다.

 

숲에서 나와 건너편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간다. 여행이 아니라 식사를 위해 자주 가족이 모이는 곳이다. 우리가 거기서 찾는 음식은 김치찜, 해물 순두부찌개, 순댓국이 거의 전부다. 따끈한 해물 순두부찌개를 떠먹으며 딸아이가 걷기를 줄여야 하지 않느냐 묻는다. 걷기 목적을 두고는 서로 다른 생각일지라도 어떤 변화를 주어야 할 시점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생각이니 토 달 이유란 없다. 고개 끄덕일 때 음성 하나 들려온다. “제국 거대 부역 도시 한복판, 점처럼 작아서 깊은 숲인 미도산에 작아서 깊은 팡이실이 본진 쌓는 일을 똑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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