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둘레길, 관악산 둘레길, 서울 둘레길, 서울 안과 경계에 있는 200m 이상인 산 22(600m 이상 산 5개는 2회씩), 북한산·도봉산·관악산 계곡 50, 서울 가까운 바깥 산 6(검단산, 남한산, 청량산, 남한산, 혜봉산, 용문산), 육상궁-정릉 백악산 순례길과 까치산-낙성대 관악산 순례길. 지난 30개월 동안 매주 일요일 거르지 않고 내가 걸은 숲길 목록이다. 모두 합하면 2,500km가 넘지 싶. 백두대간을 얼추 왕복한 셈이다.

 

이렇게 걸어도 피곤한 줄 몰랐다. 북한산 문수봉에 오른 날, 도봉산 회룡계곡 들어가다 되돌아온 날을 빼면 대부분 월요일 출근길이 오히려 가벼웠다. 그런데 지난주 어느 때부턴가 허리가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지만, 금요일 밤부터 특정 자세를 취하면 폭발적인 통증이 일어날 만큼 심해졌다. 일요일 아침에는 허리를 펴고 걸을 수가 없었다. 숲 걷기가 전격 중단됐다. 허리 구부린 채 간단한 몇 가지 일을 처리하면서 집에 머물렀다. 30개월 만에 처음 맞은 휴식이었다.

 

저녁 먹으며 아내가 물었다, 긴 시간 몸을 혹사한 결과가 아닌지.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에는 통증 양상이 심상치 않다. 좀 더 꼼꼼히 살펴본 결과 오른쪽 중둔근에 문제가 생겼음이 드러났다. 왜 오른쪽인가? 어릴 때 오른쪽 어깨를 다쳤다. 자라면서 오른쪽 어깨가 왼쪽보다 작고 앞으로 굽고 살짝 처지게 되었다. 당연히 손·팔 길이도 짧아졌다. 이 상태를 보상하려고 오른쪽 골반이 위로 올라갔으므로 다리 길이가 짧아지는 결과가 나타났다. 중둔근 약화 기전이다. 방치가 계속된다면 트렌델렌버그 증후군으로 발전한다. 아니 어쩌면 알아차릴 수 없어서 그렇지 이미 거기로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상태에서 2,500km를 걸었다면 오늘 일은 자명한 이치 소관이다.

 

자명하다고 해서 그 순간을 꼭 똑 예기할 수 있지는 않다. 그 순간을 대비해 늘 조심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상으로 혹사할 고의를 지니는 일은 불가능하다. 한나절에 산길 25km를 넘게 걸어도 다음 날 아침 힘들이지 않고 일어나 일상생활을 할 수 있으니, 무리한 걷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나는 심취가 겪어가는 필연적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숲에 심취하면, 그러니까 빙의되면 길을 잃는다. 반대로 말하면 길을 잃는 찰나 심취한다. 심취해 숲을 헤맬 때 몸은 그 곤경을 물적으로 마주한다. 두려움과 아득함이 마음을 휘몰아치지만, 몸이 그 마음을 끌어안은 채 미끄러지고 뒹굴고 떨어지고 긁히고 찢기고 턱에 찬 숨을 몰아쉬면서 길을 찾는다. 그리고 마침내 아파서 숲에 들어가지조차 못하는 오늘 같은 상황을 맞는다.

 

모름지기 상황이 이런 지경에 이르러야 비로소 몸을 섬밀하게 살필 수 있다. 지금 겪는 통증은 197831일 마취 없이 충수 돌기 절단 수술을 했던 그날을 떠올리게 한다. 예리하고 기습적인 통증이 찌르듯 자르듯 들이닥치는 찰나 입에서 악 소리가 자동으로 터져 나온다. 그 찰나 몸과 마음은 함께 통증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지고 만다. 초월 통증을 겪고 난 뒤 병과 몸을 단도직입으로 만난다. 과정과 계통을 살펴 통합 접근을 향한다. 거기서 내가 인간임을 맹렬하게 감지한다. 통증은 심취가 보낸 선물이다. 인간 각성은 숲이 건넨 전언이다. 숲에 심취하고야 각성한 인간이다. 아프지 않았다면 숲에 함몰됐고, 아픔이 숲에서 오지 않았다면 인간으로 고립됐다. 둘 다 오류다.

 

오류를 떨쳐내면 숲이 아홉이고 인간은 하나임을 각성한 사람-숲이 바로 나임을 알 수 있다. 이 각성은 두 단계로 전복을 거친다. 나라는 각성은 어디서 발원했을까를 살피면서 첫 단계 전복이 일어난다. 각성 가운데 9/10가 숲, 그러니까 공생하는 미소 생명에게서 온다. 인간중심주의가 무너지고 뒤집힌다. 그리고 여기 나는 가 아니다. “”, 그 진부하고 피상적인 인간을 전복한 나는 복수명사다. 처음부터 개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너를 포함(包涵)하지 않은 나가 여기서 무너지고 뒤집힌다. 이 중첩 전복이야말로 오늘 내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얻은 깨달음 진경이다.

 

작년 이맘때 나는 도봉산 회룡계곡 길 없는 길로 들어갔다가 실패함으로써 숲이 건넨 부역자 각성을 선물로 받았다. 그 선물은 극진한 제국주의 공부로 이어져 한해를 실팍하게 채웠다. 사회·역사적 자기 각성 과정이었다. 신년 벽두에는 아예 숲에 들어가지도 못한 실패를 통해 숲이 건넨 중첩적 자기 전복을 선물로 받았다. 이 선물이 올 한해를 어떻게 채워갈지 자못 궁금하다. 이를테면 생태·근원적 자기 각성인 셈인데 구체적 내용을 상상하며 설렘에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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