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일어나 내려다보니 밤새 눈이 와 쌓여 있다. 한낮에도 영하 기온을 유지한다고 하니 아이젠은커녕 등산화조차 없는 나로서는 숲에서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만 한다. 서울 둘레길 관악산 구간 일부와 은천골을 합한 정도면 괜찮다 싶어 걸어서 출발한다. 아파트 뒷산 능선을 따라가다가 살피재 건너 까치산길로 접어든다. 여기부터 생태 다리 두 개를 거쳐 관악산 본 자락으로 들어가는 동안에는 줄곧 능선 아닌 사면 길을 택한다. 풍경이 더 좋을뿐더러 무엇보다 사람이 드물어서다.

 

여태 홀로 걷지 않은 숲은 없다. 숲에 가는 목적이 다르니 다른 이와 함께 걷지 못한다. 나아가 숲에서 마주치는 다른 사람들과도 그리 살가운 눈빛을 주고받지 않는다. 드물게 길을 묻거나 사진을 찍어달라거나 하는 경우 말고는 섞일 일도 없다. 더러 좋은 산행 되세요.’라고 먼저 인사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거기에도 대부분 소극적으로 응대한다. 그들이 내 속을 모른 채 그들 식으로 말하듯 나도 그들 속을 모르니 내 식으로 말한다. 요컨대 제국 찌꺼기 냄새 풍기는 등산객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눈이 쌓인 탓인지 은천골에는 인적이 없다. 고요히 제의에 집중한다: 접수(接水), 음수(飮水), 삼배(三拜), (). 백설 눈부시니 물소리 더욱 맑다. 들고 나기까지 단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으니, 심사가 엄밀해진다. 매우 비밀스러울 때 거룩함은 숭고를 띠고, 웅대하게 번져갈 때 거룩함은 장엄을 두른다. 아직 장엄은 겪어보지 못했으나 기대난망인 듯하고 홀로 잠기는 숭고만으로도 고마울 뿐이다. 등산화에 아이젠 장착하고도 벌벌 기는 사내 넷을 뒤세우고 총총 숲을 나와 강감찬 생가터로 향한다.



허울 국가가 미리 챙기지 못한 사이 살기 바쁜 사람들이 야금야금 조여들어 좁고 비뚤거리는 경계를 지니게 된 강감찬 생가터는 사뭇 초라해 보인다. 그나마 이 자리에 있던 석탑을 박정희 안국사가 가져가 버려 더욱 썰렁하다. 나는 거기서 작은 돌멩이 둘을 거두어 안국사로 가 석탑 기단 앞뒤에 놓아준다. 생가터와 석탑을 되 이어주려 함이다. 식민지 시절 왜놈들한테 훼손당한 석탑이 오늘만큼은 반듯하고 기품 있어 보인다. 석탑을 떠나 나오다가 나는 홀연히 안국사 북쪽 숲에 이끌려 들어간다.



, 이런 숲이 있었다니! 드넓지는 않으나 맑은 날 한낮인데도 어둑할 정도로 울창한 침엽수림이 눈 한가득 들어온다. 아주 자주 고마움을 표하는 말이 튀어나온다. 이 작은 숲이 봄, 여름, 가을에는 어떤 느낌을 줄까 벌써 궁금하다. 이미 기대감으로 변한 아쉬움을 남겨 놓고, 강감찬 생가터와 석탑 잇는 일 아니었다면 들어가지 않았을 그 숲에서 나온다. 생사를 달리하는 인간과 숲과 돌과 땅이 어우러져 주고받는 팡이실이 역사가 일상에서 경이롭게 발현한다. 즐겁고도 엄숙하게 점심 먹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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