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사기막골 가는 길은 지도에 없는 길을 가야 해서 두려웠는데 이번 숨은 계곡 길은 지도로만 봐도 두려움을 준다. 1,000m도 안 되는 산인데 싶지만 실제로 북한산에서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는다. 더군다나 혼자서 평상복 차림으로 가니 초행길은 늘 조금씩은 두려움을 안기 마련이다. 다소 긴장된 마음으로 버스에서 내려 지도를 보며 길을 찾는다. 지도에 있어서 들어섰는데 막상 가 보니 주민이 길 없다며 돌아가란다. 처음부터 느낌이 영 싸하다.

 

밤골 들머리부터 얼마 동안 길은 소리만 들려줄 뿐 계곡물과 떨어져 간다. 물과 가까워진 다음부터는 풍경이 아주 좋다. “좋다!”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나지막한 폭포가 연속이라 할 만큼 자주 나타나 물소리를 더욱 맑게 해 준다. 나올 때도 이 길로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이닥친다. 어느 지점부턴가 갑자기 돌무더기 길이 막아선다. 돌 위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인적이 없다면 언제든 길 아닌 곳으로 발길이 향할 상황이다. 숨이 거칠어진다.

 

그때 중년 남자 사람 셋이 더듬더듬 내려온다. 그중 한 사람이 묻는다. “오신 길이 좋습니까?” 나는 가볍게 대답한다. “.”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겁에 질린 표정을 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한다. “저희는 조난될 뻔했습니다. 여러 번 길을 잃어서 짐승 길 따라왔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아예 명토를 박는다. “선생님, 연배도 높으신데, 저라면 가지 않겠습니다.” 그 많은 숲길에서 처음으로 듣는 말이다.

 

생각이 씨가 된 모양이다. 그렇다고 그냥 되돌아 내려가면 다음 행로를 구성하기 어렵다. 돌무더기 위에 서서 스마트폰 지도를 다시 들여다본다. 조금 내려가서 서쪽 효자리 계곡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경험상 이런 길은 막아놓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길을 택한다. 마지막 순례길로 정했던 곳을 거꾸로 걷는 경로다. 숨은 계곡 3/4과 함께 다음 주에 걸을 계곡 넷을 오늘 걷기로 한다. 전체일정을 앞당겨 준 이 좌초를 수용한다.

 

인적이 지워져 가는 소로를 따라 효자리 계곡으로 내려간다. 효자리 계곡은 하류 쪽은 어떨지 모르지만, 오늘 걸은 부분은 특별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 북문을 거쳐 원효봉 정상으로 향한다. 물론 정상은 밟지 않는다. 부드럽고 넓은 오지랖을 지닌 바위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 부위는 날카롭고 좁은 의상봉과 사뭇 대비된다. 내려오면서 부엽토 한 움큼을 담는다. 개연폭포 계곡은 폭포가 장관인데 접근 불가다. 그러나 소곡이라 물소리만으로도 고맙고 고맙다.


 

보리사를 끼고 돌아 잠시 백운 계곡 길을 올라간다. 법용사를 끼고 국녕사 계곡 길로 접어든다. 이 계곡은 작디작아서 가느다란 물소리가 가파른 길을 오르는 내 숨소리 사이로 간간이 들린다. 가사당암문을 지나 의상봉은 스치듯 쳐다보기만 하고 이내 청수 계곡으로 접어든다. 이 계곡도 나름 깊은데 숲길은 물길과 멀리 떨어져 있다. 서너 번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곳 풍경은 제법 좋다. 북한산 둘레길과 만나서 다시 백운 계곡 입구 쪽으로 나오니 네시다.

 

내가 마지막 계곡 순례에서 원효봉을 굳이 오르고 의상봉을 그냥 지나친 까닭이 있다. 원효는 당 제국 유학을 포기하고, 김춘추의 사위면서도 당 제국에 고구려·백제를 팔아먹은 김춘추 부역 전쟁에 반대한 각성 부역자다. 의상은 당 제국에 유학하고, 왕실 불교 핵심으로서 부역 전쟁을 합리화한 특권층(진골) 부역자다. 후세인들이 그 사실과 무관하게 산에 붙인 이름이라 할지라도 모든 싸움은 이름들의 싸움”(리베카 솔닛)이기에 나는 이런 행위 제의를 짓는다.

 

이로써 북한산 계곡 스물하나를 걸었다. 모든 계곡을 다 걷지는 않았지만 더 보태지 않는다. 도봉산과 관악산 계곡까지 합하면 오십을 걸었다. 이제 계곡 순례를 더 하지는 않는다. 숲이, 나무가, 풀이, 곰팡이가, 돌꽃이, 생명 팡이실이 운동을 파괴한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존엄한 전사라고 제의로써 선언했으니, 이제부터는 내밀한 화쟁을 시작한다. 소리 듣고 냄새 맡는다. 소리 듣되 귀로만 듣지는 않는다. 냄새 맡되 코로만 맡지는 않는다. 그 길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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