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과 관악산에 이어 북한산 계곡 순례 마무리에 들어간다. 북한산은 규모에서 앞 두 산을 압도한다. 관악산은 일상적인 지성소를 찾느라 소곡까지 톺아 스물이었지만 북한산은 이름있는 곳만 챙겨도 스물이 넘는다. 다섯 번에 열두 곳으로 들어가게 일정 잡는다. 큰 눈 내리기 전에 마쳐야 한다. 오늘은 구천 계곡으로 올라가 소귀천 계곡으로 내려온 다음 진달래능선길로 잠시 올라갔다가 백련사 계곡으로 내려올 생각이다.

 

구천 계곡에서 발원한 대동천을 따라 난 길을 걷다가 막다른 골목을 만난다. 지도를 확인하고 되돌아 나와 건너편 시가지 길로 들어서려는데 곧바로 백련사 계곡에 닿는 길을 본다. 경로를 바꾼다. 거꾸로 백련사 계곡으로 올라가 구천 계곡으로 내려오련다. 백련사 계곡은 작지만, 비가 좀 내리면 풍경이 알뜰할 곳이다. 쩌렁대는 독경 소리가 더없는 소음이다. 백련사 계곡이라는 이름이 야속하다 싶은 찰나 나타나는 무덤 하나.



심산 김창숙 선생 유택이다. 독립운동과 해방 후 정치 활동을 통해 나타난 반제국주의 인생은 물론이려니와 말년에 박정희가 예의상 찾아왔을 때 인사받지 않고 돌아누웠다는 일화가 내게 깊은 인상으로 각인돼 있다. 선생 유택이 여기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모름지기 숲이 이 근처를 지나는 내게 들리지 않는 소리로 알려준 덕에 여기 설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숲에서 만난 그 많은 무덤 가운데 처음으로 극진하게 예를 갖춘다.

 

심산 선생 유택을 둘러보면서 든 생각은 정성스럽게 격조 높게 기려지고 있지 않다.’. 봉분은 물론 주위 조경이 엉성하고, 심지어 멧돼지가 훼손한 부분은 보수 중이라는 알림 글이 무색하게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다. 차마 그곳에 앵글을 맞출 수 없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면서 또 생각한다. 반제국주의 전사 김창숙을 여기 방치한 자들이 바로 특권층 부역자 박정희를 국립묘지에 모신 자들이며 저들이 현 지배집단이다.

 

옹골진 사죄와 속죄를 걸음마다 심으며 계곡 길을 오른다. 능선에 오르니 소귀천 계곡으로 가는 소로를 막아 놓았다. 무시하고 직진하려는데 마침 어린아이를 포함한 한 가족이 그 앞에서 휴식을 취하는 바람에 우회해 능선 길을 따라 내려온다. 다른 소로가 지도에 그려져 있어서다. 거기도 역시 막아 놓았다. 이번에는 바로 직진한다. 길이 아리잠직하고 고요하다. 좌정하면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가 보이는 지성소도 있으니 좋다.


 

소귀천 계곡 물소리가 청량하다. 골이 깊고 갈래가 많아선지 수량이 실해 보인다. 인기가 많은 길이라 끊임없이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버섯과 인사를 나누는 틈틈이 단풍을 눈에 담는데 내 또래 남자 사람이 내려오면서 걸걸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이상하게 올해 단풍은 예쁘지 않네요.” 그 말 듣고 살펴보니 미처 푸른 물을 비우지 못한 잎과 이미 검은 물이 가득한 잎이 한창 붉은 잎에 과연 어지러이 섞여 있다.

 

건강한 활엽수는 그렇지 않은 나무보다 조금 늦게 일제히 색을 바꾸어 아름다운 단풍을 빚어낸다고 한다. 이를 두고 번성하기 위해 세운 전략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무리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올해 단풍이 이런 이치에서 벗어나 있다면 어떤 기후 문제와 맞닿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후 문제 또한 여지없이 제국주의 체제 소산이므로 단풍 상태만 보더라도 숲은 반제국주의 으뜸 전사여야 하지 않나.

 

소귀천 계곡 끝에서 만난 진달래 능선 따라 대동문을 향하지 않고 반대로 구천 계곡을 향한다. 구천 폭포 때문에 구천 계곡인지 알 수 없지만 구천은 높은 하늘이란 뜻인데 이름 대로 계곡이 가파르고 낙차 큰 바윗길로 덮여 있다. 위험해서 긴장하는 시간이 길지만 그만큼 기분은 고조된다. 거의 다 내려와 촉촉하고 비옥한 부엽토를 조금 담는다. 도봉·관악과 합토해 집, 한의원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나무와 풀을 응원하려 함이다.



, 한의원에서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여남은 분() 식물 생명은 거의 아내나 내가 선물로 받았다. 그런 분 식물은 대부분 일 년 안에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내 한의원 분들은 13년째, 집 분들은 7년 이상 살고 있다. 이런 차이가 사람을 아껴 사람이 된 나무라고 생각하며 사는 내게서 연유한다고 주위 사람들은 말한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숲을 반제국주의 전쟁 전우라고 생각하는 일은 결코 신비주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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