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구도 수행을 좇아 온 내게는 단학(丹學), 참선, 방하(放下), 좌망(坐忘), 명상, 기도 같은 개념과 경험이 켜켜이 쌓여 있다. 어느 순간 나는 이들이 평범하기에 내 삶과 그 정체성을 이룰 수밖에 없는 일상과 불연속인 무엇이라는 진실과 맞닥뜨린다. 설혹 연속인 무엇이라 하더라도 특별, 더 정확히는 예외로서 무엇이며 아주 찰나적-그렇지 않다면 중독-이며 그래서 배타적인 무엇임을 알아차린다.

 

배타성은 자기 완결이라는 망상과 인과를 주고받으며 끝내는 그 인과마저 벗어난다. 인과를 벗어난 자기 완결은 스스로 거룩함을 부여한다. 그 거룩함을 성불이라 하든, 등선이라 하든, 구원이라 하든, 말짱 다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자기기만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악의가 아님은 물론이다. 인류가 생태 조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빚어낸 문명이 음성 되먹임을 이탈해 자신을 포함한 온 생태계를 비가역적으로 수탈·살해하자 나름 극복한답시고 모색한 대안이다. 파멸 속도를 나름 늦추기는 했지만, 치명적·근원적인 단점을 내장하고 있다.

 

수행과 그 결실 수혜가 지극히 고립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다. 당최 왜 이런 수행이 필요했는지를 망각해서다. 인간이 문명이라는 도구로 온 생명과 공생하는 팡이실이를 파괴하고 소수 지배 집단의 물질 야욕에 몰두해서 일어난 참극을 극복한다면서 똑같은 방법을 쓴 셈이다.

 

나는 그래서 단학, 참선, 방하, 좌망, 명상, 기도로써 경지에 오른 신선, 생불, 요기, 성자 따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온전한 영성과 그 영성을 사건으로 일으키는 신적 존재는 일상 팡이실이를 통해 현현한다. 중뿔난 방법, 심오한 각성, 고결한 지혜는 또 다른 수탈·살해 덫이다.

 

코메디닷컴 보도에 따르면 eBay가 영국인 2,000명을 대상으로 행한 설문조사에서 91%가 일상사에서 평안을 찾을 수 있다는 데 동의했으며, 56%는 그 일상사가 명상 같은 방법보다 더 평안할 수 있다고 답했단다. 진리다. 어떤 진리도 평범한 일상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진실을 보탠다: 인류가 30만 년 전에 추방한 숲을 일상으로 복권해야 한다. 숲에 들고 나는 일은 장비과시하며 등반하는 일이 아니다.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일과 꼭 똑같은 일이다. 누군가 내게 말했다: 등산화도 스틱도 없이 등산하다니, 무섭다. 나는 대답한다: 등산화 신고 스틱 찍으며 출근하다니, 우습다. 내게 일상은 반제국주의 전쟁이며, 인간 너머 나무와 풀이 전우며, 전우애가 평안을 선물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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