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는 육체를 이루는 한 부분이 아니다. 피부는 생명 현상을 일으키는 근원이다. 디디에 앙지외 『피부자아』에 단 주해(2010. 8. 23.) 일부를 불러온다.
“자아는 피부다.”
이 말을 역으로 하면 “피부는 자아다.”입니다. 사실 이 말만으로도 전복적입니다. 피부를 그런 맥락으로 읽어 본 예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은이는 주어와 술어 위치를 바꿈으로써 더한층 날카롭게 나아갑니다. 피부가 자아의 부분집합이 아니고, 자아가 피부의 부분집합인 상황을 만들어버립니다. 이 명제로써 한순간에 피부는 광대한 은유가 됩니다. 피부이자 피부를 넘어선, 현실과 상상을 가로지르는 절묘한 실재성을 획득합니다.
엄마와 아기가 살을 비비는 정밀하고 사소한 일상부터, 반-생태적 제국·자본주의 문명의 제약 불가능한 경계 침탈까지, 실로 엄청나게 광대한 은유가 피부라는 경계, 즉 가장자리에서 요동치는 사건입니다. 피부는 다만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며 역동적 사건 그 자체입니다. 지은이는 피부 기능 여덟 가지를 말합니다. 지탱하기, 담아주기, 항상성, 의미, 교감, 개별화, 성욕화, 에너지화. 좀 더 엄밀히 말하면, 피부 기능이라기보다 피부라는 사건이 다양하게 발현하는 양상이라 해야 하겠지요.
이 피부 사건에 두 가지를 더해야 한다. 하나는 호흡. 폐라는 호흡기관이 있음에도 전체 호흡 중 0.6%를 피부가 담당한다.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폐는 호흡 기능을 극대화하려고 접혀 들어간 피부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럴 경우, 0.6% 호흡은 도리어 그 결정적 증거가 된다. 호흡을 기준으로 보면 생명은 피부라는 괄호 안에 있다.
다른 하나는 정보 인식. 디디에 앙지외가 적시한 교감과 다른 차원에서 피부는 소미한 정보 인식 사건을 일으킨다. 이는 면역체계와 직결된다. 교감 사건과 상보를 이루면서 에너지화와 대칭되기도 한다.
전체 맥락에서 보면, 생명은 다양한 피부 주름이다. 생명 사건은 다양하게 변주하는 피부 사건이다. 피부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감각, 의식, 자세를 혁명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피부는 개별 생명체로 일단 떼어서 생각하면 가장자리다. 다른 생명체와 상호작용하는 관계로 생각하면 ‘중심’이다. 단독으로는 살아갈 수 없으므로 결국 생명 ‘중심’은 피부다. ‘중심’인 피부가 가장 깊다. 더 깊은 내면 따위는 없다.
이런 생명 이치는 어디서 발원했을까? 자크 타상은 『나무처럼 생각하기』에서 인간이 숲에서 태어났으며 나무 생명 이치를 몸에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이 은유가 아님을 안다. 『나무처럼 생각하기』를 주해한 <10. 껍질이다>(알라딘 서재 2021.5.3.)를 불러온다.
나무가 예민한 성향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향적이지는 않다. 장기도 내면세계도 없는 나무는 철저히 외부를 향한다.
나무를 정의하자면, ‘밖으로 드러나 많은 가지를 치고 곧게 서며, 땅과 하늘에서 자양분을 얻고 개체화한 동시에 결합한, 살아 있는 껍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껍질’이라는 말의 다의적 특성을 이용한 정의다. 껍질이라는 말은 표면은 극대화하고 부피는 극소화한, 기하학적 의미를 담는다.(58쪽)
살아 있는 존재가 표면을 넓히는 것은 교류 가능성, 외부와의 공유영역, 예민한 부분을 확장하는 것이다.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감도 드높이는 것이다.(60쪽)
나무는 자신에게 의지할 뿐만 아니라 세계에도 의지할 줄 안다. 반면 인간은 세계를 복종시키고 제 입맛에 맞추려 한다···
인간은 내면에 깊게 박힌, 거드름이 극대화되어 나타나는 자만심을 버려야 한다. 그러면 정신의 유연함과 세심한 주의력을 잇는 ‘힘, 시간, 공간의 특수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나무에게서 지혜를 찾아야 한다면,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세계와 영원히 합일하는 나무의 능력에서 우선 찾아보자.(62쪽)
자크 타상의 “나무는 껍질이다.”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디디에 앙지외의 “자아는 피부다.”라는 말과 포개진다. 나무도 인간도 우주 구조와 운동 원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면 결국 최소 범주 공변양자장도 표면이고, 최대 범주 우주 전체도 표면이라고 상상할 수밖에 없다. 삼라만상의 본령이 껍질이고 피부고 표면이다. 너무 작아 볼 수 없는 세계도 너무 커서 볼 수 없는 세계도 결국은 “개체화한 동시에 결합한” 네트워킹이기 때문이다. 네트워킹 바깥이 존재할 수 없듯 네트워킹 안쪽, 그러니까 “내면”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네트워킹의 “중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내면 운운하고 중심 운운하는 것은 죄다 망상이다. 망상은 없음에도 있다고 우기는 정신병이지만, 있도록 만들어서 바깥과 주변으로 여기는 존재를 복종시키고 수탈, 살해한다면 범죄다. 물론 현 상황에서는 양자 구분이 무의미하다. 정신병자가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치료와 징벌을 결합한 처결은 필수다. 나무 앞에 무릎 꿇려 그 껍질 본질을 직면하고 그 껍질 삶, 즉 “교류 가능성, 외부와의 공유영역, 예민한 부분”을 극대화하도록 엄명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신의 유연함과 세심한 주의력을 잇는 ‘힘, 시간, 공간의 특수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철저히 외부를 향”하는 것이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감도 드높이는 것”임을 증명하게 된다. “세계와 영원히 합일하는 나무의 능력”을 복원하게 된다. 다시 확인하거니와 인간에게는 내면이 없다. 다시 확인하거니와 인간은 중심이 아니다. 모두 평등하게 개체화한 동시에 결합한 네트워킹에 참여하는 껍질로 복귀하는 것만이 성불이며 구원이다.
나무는 껍질이다. 생명은 피부다. 피부가 일으키는 네트워킹, 그러니까 팡이실이, 이야말로 제국주의 반대말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에 이처럼 핍진한 표현은 다시 없다. 그러면
껍질, 그러니까 피부를, 어떻게 결결이 겹겹이 대해야 할까? 피부는 지극한 거룩함과 질탕한 즐거움이 비대칭 대칭을 이루는 사건이며 실재다. 이 이율배반과 모호함을 흔쾌히 흠뻑 끌어안아야 한다. 정중하게 모시는 일과 까불대며 함께 노는 일에 동시 감각이 일어나야 한다. 바라보기, 닿기, 만지기, 쓰다듬기, 다독이기, 도닥이기, 문지르기, 비비기, 닦기, 씻기, 두드리기, 때리기, 긁기, 간질이기, 누르기, 주무르기, 접기, 펴기, 핥기, 빨기, 깨물기, 벌리기, 끼워 넣기, 찌르기, 짜기, 째기, 자르기, 데우기, 태우기, 식히기, 적시기, 말리기, 불기, 뿌리기, 바르기, 싸매기···수많은 접촉이 수많은 생명 사건을 일으키므로 한꺼번에 주의하고 하나하나 집중해야 한다.
한의사인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침으로 피부를 찌르는 치료를 한다. 침 찌르기는 근본적으로 피부 사건 일으키기다. 침이 찔러지는 경혈 흐름인 경락은 피부를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경락이 혈관계·신경계·림프계들로 진화하기 이전 피부 미분화 정보·에너지 전달 체계였다고 본다. 물론 경락 이전 단계에서 피부는 세포 하나하나마다 감각·기억·전달·치료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세포들 사이에 원시 팡이실이도 있었다. 그 원시 팡이실이가 나중에 경락을 거쳐 혈관계·신경계·림프계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고대 동아시아인들이 경락과 침을 발견한 일은 실로 위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침은 동종의학과 이종의학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앞으로 좀 더 치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나는 여느 한의사와 달리, 침을 찌르기 전에 특별한 경우 말고는 반드시 침 찌를 곳에 가벼운 터치를 한다. 단순히 대기도 하고, 문지르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고, 누르기도 한다. 대부분은 가볍게 톡톡 두드린다. 가볍게 두드리는 동작은 매우 소미한 통증 유발, 또는 정보 전달 효과를 낸다. 손가락 머리(指頭)를 모으고 세워 두드리면 생체 광자(photon)들이 다량 방출된다. 생체 광자가 정보 전달을 통한 치료 능력을 발휘한다. 이들은 동종의학이다.
동종의학은 소미심심(小微沁心) 의학(medicina tenuissima)이다. 소미심심 의학은 피부에서 비롯하여 배어들고 배어난다. 피부에서 비롯하여 배어들고 배어남으로써 생명이 피부임을 증언하는 서사가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