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이 없다. 일요일 아침 일어나 늘 하는 청소, 빨래, 낭풀 돌보기를 하면서 떠오르는 생각대로 움직이자 한다. 지난번 회룡 계곡에 길 없이 들어가 담아온 비옥한 부엽토를 낭풀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다 문득 회룡 계곡 다른 갈래, 지도에 실선으로 표시된 길을 걸어 송추 계곡 다른 갈래 길을 걸어보기로 작정한다. 이는 도봉산과 사패산 경계를 이루는 직선에 가까운 재넘이길이다.

 

일단 지하철로 도봉산역까지 간다. 도봉산역에서 회룡역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면서 도봉산을 향해 서니 유려한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문제는 전신주와 전선이다. 풍경에서 결정적인 지점을 그들이 어지럽힌다. 이런 살풍경을 만들어내는 싸구려 마구잡이 공학은 인간과 자연 모두를 모욕한다. 무심코 지나치면 아무것도 아니나 이는 공간 구성에서 보이는 대표적 식민지성이다.



회룡역에서 내려 전과 다른 경로를 택해 회룡 계곡 쪽으로 간다. 한참 걷는데 갑자기 눈앞에 수많은 애도 화환이 나타난다. 그들이 늘어선 건물을 확인한다. 호원초등학교다. , 김은지·이영승 교사가 희생된 곳이구나. 순간, 나를 여기로 이끈 팡이실이(networking)를 감지한다. 이렇게도 드러나는 식민지성을 아파하며 한참을 서 있는다. 오늘따라 몸이 더 가라앉고 힘이 빠진다.



사실 일요일 오전 숲을 향할 때마다 몸과 마음 상태가 좋지 않다. 한 주간 도시 독성이 쌓여 그렇다. 어떤 경우는 그냥 돌아가야 하지 않나 싶을 만큼 휘지는 상태를 느낀다. 숲에 들어서면 부지불식간에 가벼워지고 힘이 난다. 숲이 독을 풀고 기운을 북돋운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점심을 굶고도 걸어 내는 일이 드물지 않다. 이미 열한 시가 넘었으니 오늘 또한 그러기 십상이다.

 

회룡사거리라 불리는 고개 가까이 다가갈수록 경사가 심해진다. 철제 계단이 곳곳에 길게 이어져 있다. 마지막 구간은 철제 난간을 붙잡지 않으면 갈 수 없을 만큼 가파르다. 두 주 전 이런 경사진 숲을 아무런 장비도 없이 헤맸다고 생각하니 새삼 오싹해진다. 이런 시설 믿고 술 냄새를 풍기며 떠들어대는 패거리를 뒤로하고 능선에 다다른다. 온몸이 후들거린다. 저혈당 상태다.

 

쉬지 않는다. 적절한 점심때를 이미 놓쳤으므로 조금은 서둘러 송추유원지에 닿아야 한다.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당 부족이 실하게 느껴진다. 다음 순간 머루나 다래 있으면 알려주세요, 하고 숲에 도움을 청한다. 3~4분가량 걸었을까, 다른 사람은 보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머루랑 다래가 거의 같이 눈을 향해 달려온다. 재빨리 허기를 면한다. 소름은 그다음에 돋는다. 고맙습니다!



송추유원지에 닿아 허름한 음식점으로 들어간다. 열무국수를 주문하고 시원하게 막걸리 한잔부터 들이켠다. 주인장이 여수 갈치속젓을 반찬으로 내주며 어디서도 먹을 수 없다고 자랑한다. 과연 일품이라 칭찬했더니 두서없이 온갖 자랑을 퍼붓는다. 대장동 얘기가 어디선가 튀어나오더니 느닷없이 정치인 욕을 줄줄이 해댄다. 제일 나쁜 놈 빼는 걸 보니 인생도처 유부역이로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송추 계곡을 따라 흐르는 개울로 간다. 발 담그고 앉아서 여기저기서 물놀이하는 도시인을 둘러본다. 한 여자 사람이 신발 신은 채 물속을 걷는데 마치 살얼음판을 디디듯 한다. 물속에서 물과 따로 노는 기이한 풍경이 그렇게 지나간다. 저들이 흩어진 뒤 여기 남겨지는 숲과 물은 식민지성에 중독된 저들에게 무엇일까. 숲과 물이 하는 말을 정말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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