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도덕할수록 통치집단은 관변 조직을 왕성하게 키운다. 간접적이라 위화감을 줄일 수 있고, 자발적이라는 인상을 줌으로써 능동적으로 선전·선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가 키운 부역 단체에 관해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을 통해 상세하게 밝힌 윤해동 님 글을 인용한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시정 일반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인을 선별하여 또는 조선인 단체를 선별하여 지원금을 대여하고 그들을 육성하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인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동화·친일 정책은 매우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3·1운동 직후≪京城日報≫에서 발간한≪朝鮮騷擾の眞相≫에서는 ‘조선인의 광범위한 저항은 총독정치, 식민지 통치에 대한 조선인의 무지와 이를 알리기 위해서는 온건한 인물을 키워 새로운 정치의 이해를 꾀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는 개인의 효용성과 단체의 효용성을 두고 후자가 좀 더 조직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리라고 판단하여 일진회와 같은 각종 친일 단체를 설치하였다. 친일 단체란 식민지 한국에서 조선총독부 및 일본 정부의 사주·지원으로 조직된 어용·반민족적 결사를 말한다. 총독부가 친일 단체의 조직에 관심을 보인 것은 사이토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당국의 태도를 분명히 취하는 것만으로는 흑백을 가리기 어렵고 또한 흑백이 선명하게 가려지지 못한 결과로 압박정치라는 따위의 비난이 높아가는 것은 본의가 아니다. 따라서 이 기회에 일반 인민의 거취를 분명히 밝히도록 하는 방법으로서 믿을 수 있는 민간 유지를 시켜 은밀히 조선인 가운데 우리(일본)와 같은 이상과 정신을 지니고 신명을 걸고 일을 해 줄 핵심 인물을 골라낸다. 다시 이 인물로 하여금 귀족·양반·유생·갑부·실업가·교육가·종교가 등에게 각 계층과 사정에 따른 각종 친일 단체를 조직하게 하고 이에 얼마간의 편의와 원조를 주어 충분히 활동하게 한다(朝鮮總督府,<朝鮮民族運動に對する對策>,≪齋藤實文書≫4).
이러한 친일 단체를 조직하게 된 것은 조선인의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고 폭넓은 지지 세력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즉 식민지 각계각층에 침투하여 조직적으로 동화정책을 시행하는 데 친일 단체는 매우 유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직된 단체는 국내의 國民協會·矯風會·大東同志會·大正親睦會·維民會·小作人相助會·大東斯文會·商務社·相愛會·甲子俱樂部·同友會 등이며, 국외 특히 만주에서는 保民會·朝鮮人民會 등이 활동하였다. 이 가운데 조선총독부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을 받으면서 친일 행위를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는 국민협회다.
국민협회는 1919년 8월 1일 閔元植이 세운 協成俱樂部를 개칭하여 친일 단체로 전환한 것이다. 1920년 1월 경무국 사무관 마루야마 쓰루기치(丸山鶴吉)의 지원으로 조직되었다. 회장 민원식은 일본 수상 하라의 내지연장주의에 기대어 조선의 자치 청원 운동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친일 여론을 조성하였다. 특히 민원식은 참정권 청원 운동에 진력하면서 일본의 자금 혜택으로 친일활 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가장 먼저 처단할 인사로 민원식을 지목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행위는 친일의 전형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이른바 신일본주의를 주창하면서 일제의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고 나아가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 하지만 국민협회도 민원식이 梁槿煥에게 암살당한 이후 그 활동은 급격하게 퇴조하였다. 당시 국민협의의 대표적인 구성원은 金明濬·鄭丙朝·金甲淳·韓永源·李炳學·金錫永·申錫雨·朴鳳柱 등이었으며, 후일 有志聯盟의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음으로 평양에 본부를 두고 활동한 大東同志會를 들 수 있다. 평안남도 지방은 일본에 대한 저항 의식과 저항운동이 강한 지역이므로 일제로서는 이 지역에 대한 잠재적인 저항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전 통감부 간도파출소 핵심 인사였던 평남지사 시노타 지사쿠(篠田治策)의 지원 아래 선우순과 羅一鳳·金興健 등에게 대동동지회를 조직하게 하였다. 대동동지회의 친일 행위는 주로 강연과 선전에 의존하였다. 즉 친일 여론을 모으기 위하여 조선 민중이 최후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일본 통치에 달려있다고 하는 조선총독부의 新政을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평양에 본부를 두었기 때문에 그 이외의 지방에까지 세력을 넓히는 일은 어려웠다.
한편 일제는 대지주·기업가를 포섭하고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維民會를 설치하였다. 또한 지역 유생들을 친일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대동사문회·儒道振興會를 설립하였다. 유도진흥회는 1920년 1월 16일 서울 및 지방 유림 88명이 서울에 모여 조직한 단체이다. 이 단체는 양주·남양·장단 등을 중심으로 빠르게 지회가 설치되었으며, 각 도지사 역시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다. 유도진흥회의 설립목적은 ‘유도를 진흥해서 피폐한 유풍을 되살리고 동양 도덕의 진원을 발휘하여 민심의 안정’을 꾀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와 부합되는 것으로 金榮漢 등을 중추원의 참의로 우대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단체는 친일 유생을 이용하여 각 지역의 민중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일제는 보부상 단체인 商務社를 이용하여 식민지인에 대한 민간 감시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한국 근대사에서 보부상 집단은 주로 어용·반민족·전근대적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에 사이토 총독은 보부상을 상무사로 바꾸어 대민 감시를 강화했다. 당시 인물로는 李寅榮·金光熙·李址鎔·구연수 등이었다. 그러나 이 단체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매우 격렬하였으며 활동 역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국내에서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커지면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제는 이 대항책으로서 탄압과 회유를 목적으로 위축된 친일파 연합을 추진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직된 각파유지연맹은 1924년 1월 발기인대회를 통해 4월 11일 경성호텔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즉 국민회의·조선소작인상조회·유민회·동광회·노동회·조선경제회·교풍회·노동상애회·대정친목회·동민회·유도진흥회·청림교 등 12단체가 연합하여 친일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연맹은 일본과 조선의 융합에 힘쓰며 한일합병의 대원칙하에 두 민족이 영원한 행복, 발전을 위해 일치단결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과격사상의 배격, 총독정치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야 한다고 하였다. 이들 단체는 사회주의 사상의 만연과 이를 통한 식민지인의 저항이 광범위하게 전개될 것을 우려한 일제에 의해 조직된 허수아비 단체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많은 조선인은 허울 좋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매몰되어 자기 민족을 가혹한 식민 통치의 수탈구조에 고착시켰다.
일본제국주의는 이러한 친일 단체를 통하여 조선 민중에게 민족개량주의 사상을 침투시켜 식민지지배에 협력시키려고 하였다. 이 부르주아 상층부는 식민지지배의 달콤한 유혹에 현혹되어 독립 시기상조와 독립 불능을 주장하면서 적극적인 저항운동은 펼칠 수 없었다.”
관변 조직을 숙주 삼아 부역한 자들 484명 명단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렸다.
강근도 강병순 강병주 강성구 강영균 강영희 강용희 강이황 강인우 강일성 강홍범 고덕환 고용덕 고용종 고응민 고청룡 고황경 고희준 구연수 구창조 국기연 궁사청 궁하일 권병수 권우섭 권중기 권태동 길태홍 김갑명 김경식 김경호 김광엽 김광현 김구순 김권형 김규대 김규창 김기수 김기주 김기찬 김덕선 김동일 김동진 김동현 김두명 김두정 김두천 김명준 김명진 김명집 김몽필 김병걸 김병규 김병순 김병익 김복수 김봉기 김사연 김사영 김상익 김석연 김석진 김석태 김선술 김선재 김성렬 김세장 김세진 김시현 김신석 김연상 김연식 김영걸 김영구 김영설 김영우 김영준 김영희 김예현 김용진 김윤덕 김윤혁 김응구 김인창 김인하 김일수 김재곤 김재룡 김재순 김재익 김재홍 김재환 김정국 김정규 김정민 김정호 김제홍 김종완 김종헌 김준모 김준섭 김지련 김진태 김진하 김창도 김태섭 김태익 김태헌 김태형 김태훈 김택용 김택현 김한경 김한기 김해룡 김형태 김호중 김홍건 김환 김환성 김효순 김효진 남정관 노성석 노신근 노영근 노응린 노정규 동운경 문명기 문의홍 문익주 민영은 민원식 민재기 민정식 민태직 박계일 박구학 박규양 박규장 박규철 박병기 박병철 박봉윤 박선철 박성택 박순천 박승직 박영길 박영래 박영준 박영철 박우용 박은양 박주율 박준영 박지양 박창서 박창훈 박필원 박해묵 박혁준 박형채 박호병 박희도 방낙선 방운갑 방의석 배동운 배상하 백기수 백낙원 백동수 백윤호 백형수 변기택 사현필 서병은 서병조 서상건 서상환 서은상 서창보 서채 석문용 선우순 성원경 성준 소완규 손서헌 손영목 손응국 손재근 손치은 손홍원 송계원 송규환 송병천 송완섭 송은용 송재철 송종대 신국원 신동원 신동훈 신두현 신문언 신병휴 신석린 신승균 신영석 신영오 신의학 신재정 신태악 신태항 신효범 심도풍 심상직 심원섭 심의혁 안근모 안방렬 안순환 안익수 안인식 안종국 안준 안중수 안태영 양성식 양재익 양정묵 양주익 양지환 엄주명 엄주익 엄준원 여계보 염중모 염창순 예종석 오경식 오긍선 오기영 오두환 오성룡 오역선 오왕근 오응선 오필영 원덕상 원세기 원수남 원응태 유길수 유두환 유문경 유병문 유병의 유봉기 유봉주 유봉현 유상화 유석우 유영렬 유재한 유전 유제구 유지훈 유창만 유학주 유홍종 윤갑병 윤경순 윤귀영 윤규식 윤달수 윤대섭 윤대식 윤명진 윤범식 윤봉의 윤상우 윤상익 윤시병 윤익선 윤정식 윤창업 윤춘혁 윤치형 윤치호 이각종 이겸로 이겸제 이경렬 이경로 이경하 이규학 이규화 이근우 이기승 이기찬 이동락 이동영 이동우 이동초 이동혁 이두수 이문표 이민관 이방 이범승 이범찬 이범철 이병림 이병립 이병연 이병의 이보현 이석규 이석신 이석희 이선학 이선협 이성근 이성환 이승우 이승운 이승한 이승현 이승호 이영근 이용구 이용문 이용한 이우현 이원규 이원보 이익성 이인수 이인흡 이정봉 이정욱 이종만 이종용 이종춘 이준용 이중현 이찬모 이찬요 이창선 이창엽 이창환 이치로 이태윤 이필규 이학재 이항발 이행민 이현우 이희덕 이희두 이희섭 임병익 임봉석 임용상 장동환 장두현 장순창 장진원 장헌식 장홍식 전만영 전부일 전성욱 전영배 전영조 전위현 전창근 전태현 정경수 정계형 정교원 정규원 정규환 정대현 정도영 정병조 정석모 정세진 정연상 정용태 정원섭 정인순 정환종 조대묵 조덕하 조병렬 조병상 조선하 조성근 조승환 조용률 조인성 조진우 조흥원 주련 주병섭 주성근 주학현 지봉서 차재정 차준담 차화준 천영기 최건호 최기남 최동섭 최두환 최병창 최상익 최수길 최양호 최영구 최영년 최영욱 최운섭 최원교 최정규 최정덕 최정묵 최주현 최준집 최진현 최창학 최창호 최홍섭 탁태윤 편상영 하준석 한경원 한교연 한국림 한국현 한규복 한기방 한남규 한보순 한상건 한영호 한욱 한재익 한정규 한창회 한태섭 한화석 함창현 허균 허현 현영섭 현장호 현준호 홍규표 홍긍섭 홍남표 홍사훈 홍승균 홍승원 홍윤조 홍인순 홍종덕 홍종면 홍준 홍충현 황규현 황대원 황명중 황석건 황정헌 황종국 황종우 황철수
특권층 부역 집단 아이콘 윤석열이 최근 진심 중인 말로 “카르텔”이 있다. 자유총연맹, 재향군인회, 대한노인회, 새마을운동중앙회, 바르게살기운동 중앙협의회···이런 부역 조직과 반대되는 시민 단체를 포함해 부역에 동참하지 않는 온갖 대상을 싸잡아 일컫는 그 특유 “냅다 집어던지는” 어휘다. 이 또한 부역 통치집단이 전가 보도로 휘두르는 언어 선점이다. 투사 전술이다. 대한총독부 수반답다. 소심한 소시민이 체감하는 모멸감은 조선총독부 치하보다 맹렬하게 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