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이 스스로 드러내는 증후 가운데 하나가 새벽잠 없어지는 사건이다. 일요일 새벽 네 시도 채 되지 않아 홀연히 잠에서 깨어 돌연히 떠오른 한 생각을 붙든다: 오늘은 산 숲이 아닌 능 숲으로 가야겠다. 여주 세종대왕릉으로 가자. 교통편과 걷기 경로를 탐색하며 아침이 되기를 기다린다. 아내 방에 있는 컴퓨터로 좀 더 정밀하게 알아봐야 한다.

 

날씨가 심상치 않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비가 거의 폭우 수준으로 내린다. 일기예보를 보니 오후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고 한다. 레인부츠를 꺼내 놓고 2주 연속 숲속에서 게릴라 폭우를 견딘 사실에 유념한다. 문제는 지금 부는 바람이 먼 가지지만 태풍이라는 데 있다. 아내가 영릉행을 반대한다. 숲으로 가는 일이 고행은 아니잖아요. 그러게나···.

 

나는 발길을 돌려 광화문 교보로 향한다. 관심 분야는 시중에 읽을 책이 없어진 지 이미 오래지만, 두루 둘러보자 하고 간다. 인문 신간 진열대에서 리베카 솔닛이 돌연 튀어나온다. 얼른 집어 들고 보니 그 밑에 다른 책이 쌓여 있다. 아마 손님 중 누군가 잊고 간 모양이다. 한참 기다리다가 선물이라 여기고 계산대로 간다. 인연은 이렇게도 오니 말이다.



지난주에 이어 다시 백악으로 향한다. 백악은 내 제당이기도 하려니와 모든 길이 살뜰하게 보살펴져 있어 험한 일기에도 안전히 걸을 수 있다. 역시 인적이 거의 없다. 청와대 전망대로 가는 일방통행로를 거슬러 간다. 비 그치니까 시야가 말쑥하게 열린다. 일망무제 들어오는 발아래 도시 풍경이 깔끔하다. 깔끔도 찰나, 따끔한 살갗 느낌이 들이닥친다.


, 이 전경은 식민지 구도다. 백악산 앞 청와대, 청와대 앞 경복궁, 경복궁 앞 조··, ··동 앞 관악산. 이 축을 둘러싼 기괴한 반역사적 빌딩 숲이 자연 숲을 전방위로 밀어내고 암 덩어리처럼 빽빽히 들어차 있다. 빌딩 숲을 차지한 특권층 부역자가 대한민국소유주다. 그 중에서도 강남 빌딩 숲을 분점한 과두가 사실상 토건 대한 재벌 왕회장이다.

 

망연자실 내려다보다가 마음 모아 ㅅ········ 참소리 축원을 올린다. 인간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비인간 누구나 들은 이 비나리가 허공에 그저 흩어지지는 않음을 새겨둔다. 비와 땀으로 몸까지 정화했으니 이제 숲을 떠난다. 떠나기로 하고 들어온 숲이며 되들어오기로 하고 떠나는 숲이다. 순례는 계속된다. 내가 삶을 거둬들일 그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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