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부역 서사
1. 통속 불교에는 아예 사회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색공불이(色空不二)’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를 읊조리며 제국에 부역하고 독재에 부복하는 일에 기탄없고 성찰 없다. 염불에는 관심 없고 잿밥에만 눈독 들이는 사판승은 그렇다 치고 견성성불(見性成佛)했다는 선승조차 군홧발이 절 앞마당을 더럽힐 때 자기 청정을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 유지한 불교 조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중생제도는 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사실 이런 문제는 모든 종교에 두루 통한다. 하필 불교만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할 논리적 근거는 없지만 이 땅에 가장 먼저 들어온 ‘고등종교’로서 그동안 호국불교를 자부하며 쌓아온 전통은 일제 부역 논리 앞에서 무엇이란 말인가. 지킬 나라가 일본제국인가. 제국이 식민지 종교 따위가 지킬 대상인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으니 더는 빈말을 말아야겠다. 그저 부석암 주지 임혜봉이 기독교사상 2011년 8월호에 게재한 글 전문이나 인용한다.
“불교계의 친일은 한일합병조약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최취허(崔就墟) 스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의 해제에 노력한 일본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에게 감사장을 주었다. 승려의 입성 해금 문제는 다른 학자가 이미 지적했듯이 갑오경장(1896년) 등 당시의 사회적 개혁 분위기로 볼 때 일본 승려의 활동이 아니었더라도 조만간 해결될 문제였다. 최취허는 1911년 사찰령이 반포되었을 때도 일왕과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식민 통치를 ‘성덕명정’(聖德明政)이라 찬양하였다.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직후 친일한 승려로는 이회광(李晦光, 1862-1933) 스님이 있다. 그는 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6일, 조선불교 원종과 일본 조동종의 연합조약을 조인하였다. 나라가 강제로 일본에 병합된 지 45일 만에 조선불교를 일본 불교에 복속시킨 것이다. 이회광은 당시 조선 승려들로부터 ‘매종역조’(賣宗易祖: 종단을 팔고 조상을 바꿈)의 망동이라며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일합병조약 초창기에 아직 일제의 친일이 강요되기 전 한국 승려가 행한 대표적인 친일 행적은 두 가지를 열거할 수 있다. 첫째는 총독부가 1911년 11월 사찰령을 반포했을 때이고, 두 번째는 일왕 메이지(明治)가 죽었을 때(1912년 7월 30일)이다.
총독부가 사찰령을 반포하자 30대 본산의 하나인 강화도 전등사의 주지 김지순(金之淳)은 사찰령 시행은 “메이지(明治) 일왕의 강은홍택(降恩鴻澤)”이라는 내용의 ‘성은(聖恩)으로 사법(寺法)인가’라는 글을 <조선불교월보> 제10호(1912년 11월호, 2~4쪽)에 발표하였다. 이는 한국 승려가 총독부의 불교 정책을 일본 메이지 일왕의 ‘성스러운 은혜’라고 찬양한 것이다.
일왕 메이지가 죽었을 때도 자진해서 친일한 승려가 있었다. 즉 1912년 7월 30일, 일왕 메이지가 죽자, 서울 봉원사의 주지 이보담 스님은 메이지의 위패를 법당에 봉안하고 절 안의 스님 60여 명을 독려해서 독경하였으며, 장례일에는 추도식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49재까지 지내주었다. 이때 이회광 스님과 양평 용문사의 주지 김용태 스님도 메이지를 추모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들처럼 합병 초기에 자진하여 친일한 한국 승려들은 극소수이다.
일제가 조선 민족의 황민화(皇民化:日本化) 운동을 전개한 것은 제6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재임: 1931.7~1936.7)이다. 우가키는 만주사변(1931.9)과 그 결과로 성립된 만주국(1932.3)을 토대로 대륙을 침략하려는 일본 군부의 야망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식민지 조선에 황민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심전(心田)개발운동’이었다. 우가키가 주창한 심전개발운동은 조선 민족의 순량화(順良化)와 일본화(日本化) 작업의 일환이었다.
불교계는 이 운동의 ‘심전’이란 명칭이 불경에서 유래하였다 하여 호감을 표시하고 일부 승려들이 적극 호응하였다.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한 승려는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본산 주지 5명과 학승 2명이었다. 즉 용주사 주지 강대련, 봉은사 주지 강성인, 범어사 주지 오리산(吳梨山), 화엄사 주지 정병헌, 월정사 주지 이종욱 스님 등과 <불교시보>의 발행인 김태흡(법명 대은) 및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 권상로(權相老) 스님이었다. 특히 김태흡과 권상로는 심전개발 관련 강연과 저술로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불교계의 친일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중일전쟁(1937.7)이 시작되면서부터 일제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불교계에도 노골적인 친일을 강요하였다. 더구나 중앙교무원의 주요 임원 스님들이 이에 적극 호응함으로써 불교계 전체가 친일 대열에 휩쓸려 들어갔다. 중일전쟁 초기 불교계의 친일 행위로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열거할 수 있다.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의 31본사 주지 대표 이종욱(월정사 주지)과 전국 본사 31개 사찰은 1937년 7월 25일과 8월 1일 2회, 전 조선의 말사(末寺)와 포교소는 8월 1일 1회 오전 5시를 기하여 일제히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을 봉행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전 조선의 31개 본사와 1천 3백 6개의 말사의 승려 7천 명이 일본군의 승리와 일본의 국위선양을 위한 기원제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7월 24일에는 교무원의 재무 이사 황금봉 스님이 조선군사후원연맹 결성식에 참석하였다. 이 연맹은 후방의 임전 체제 확립을 위해 만든 단체인데 불교계도 참석하여 일본군을 후원하는 일에 협력하기로 한 것이다.
총독부에서 중일전쟁과 관련된 전국 순회 시국강연반을 결성하여 1937년 8월 6일부터 2차에 나누어 13도 각처를 순회 강연했는데 강사는 1차에 22명, 2차에 59명이 동원되었다. 전국 시국 강연회에는 권상로가 조선 불교계의 대표 연사로 1차는 경북지방, 2차는 함경북도 지방을 순회 강연하였다.
조선 불교계에서는 독자적인 시국 강연회도 개최하였다. 즉 8월 5일 서울 개운사에서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 법요를 한 후 박성권, 김경주, 김영수 스님이 시국 관련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8월 6일에는 부민관(훗날의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국기요배 등 일본식 국민의례를 한 후 이종욱 스님의 사회로 시국에 대해 의미심장한 개회사를 하고, 권상로와 김태흡(대은), 두 친일 학승이 열변을 토하여 2천 3백여 청중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지 1개월째인 1937년 8월 8일부터는 이종욱, 임석진, 황금봉 등 조선 불교계의 주요 간부 스님들은 중국으로 출정하는 일본군 부대의 환송을 나갔다. 이날 이후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중일전쟁에 출정하는 일본군 파견부대의 환송 행사에 참석하였다.
중앙교무원은 일본군 부대의 송영과 아울러 전국 사찰에서 국방헌금과 위문금도 거두게 하였다.
1937년 8월 31일 현재 교무원이 집계한 본사별 시국 대처 보고 일람에 의하면 각 본사에서는 7월 25일과 8월 1일에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 법요를 거행했다. 여기에 참석한 인원은 3,000명이었고, 시국 강연을 한 곳은 위봉사(8월 7일), 은해사(8월 7일), 성불사(7월 26일) 등이었다. 이때 거두어진 국방헌금은 누계 598원 60전, 위문금은 합계 751원 24전이었고, 일본군 전사자를 위한 위령제를 지낸 본사는 성불사(8월 19일), 영명사(永明寺, 8월 22), 법흥사 그리고 사리원의 고산사(高山寺)등이었다.
1937년 9월 중 조선 사찰에서 헌납한 국방헌금 상황은 다음과 같다. 전등사 본·말사에서 156원, 은해사 본·말사에서 113원 50전, 중앙불교전문학교 직원 일동이 16원, 서울 각황사에서 27원, 성불사 본·말사에서 42원 69전, 해인사에서 100원, 해인사 소속 암자인 삼선암에서 2원 50전, 약수암에서 5원을 국방헌금으로 바쳤다. 이어 김천 직지사에서 12원, 남원 실상사에서 4원 65전, 선산 대둔사에서 12원, 산청 새동포교당에서 7원 40전, 안동 포교당에서 133원 50전과 금가락지 1개와 천인침(千人針) 1매를, 철원 심원사에서 172원 35전, 강릉포교당 30원, 진주읍성외 불교부인회에서 105원 등을 헌금하여 합계 977원 88전이었고, 누계는 무려 3천 5백 4십 8원 19전에 이르렀다. 이후 조선 불교계의 국방헌금은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불교계에서 1937년 12월 중국 화북지역에서 중국을 침략하는 일본군을 위문하는 ‘북지(北支:북중국)황군위문사’를 파견했다는 사실이다. 중앙교무원에서는 이종욱의 주도로 전국 사찰에서 경비를 조달하여 북지황군위문사로 최영환(최범술의 식민지 시대 이름), 이동석(선암사 승려), 박윤진(서울 흥국사 승려) 세 스님을 선발하였다. 이 세 스님은 모두 일본에 유학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엘리트 승려들이었다. 이들은 젊은데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다.
황군위문사 세 스님은 출발 전에 총독부, 용산의 일본군사령부 등에 가서 인사를 하고 음악가 문학준과 윤건영, 이종태, 그리고 총독부 직원 1명 등 모두 7명이 1937년 12월 22일 서울에서 출발해 한 달 동안에 화북지역의 일본군을 위문하고 1938년 1월 18일 돌아왔다.
1938년 7월 1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창립총회가 부민관에서 열렸고, 이어서 ‘정동연맹’ 봉고제가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서울에 있던 최고의 일본 신사)에서 개최되었다. 31본사 주지 대표 이종욱 스님은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을 대표하여 두 곳의 행사에 모두 참석했다. 이종욱 스님이 주도하는 중앙교무원에서는 ‘정동연맹’의 회원 단체로서 연중 세 번 네 번 실시되는 총후(후방) 보국 강조 주간에 전 조선 사찰이 그 실시 요항을 잘 따르고 협력하도록 지도하였다.
불교계의 가장 이채로운 친일행각의 하나가 탁발 보국이다. 탁발은 발우에 음식을 얻어 식사를 해결하고 수행에 전념하는 불교 전래의 독특한 전통이다. 그런데 불교 고유의 탁발이 친일하는 데까지 이용되는 우스꽝스럽고 한심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속칭 탁발 보국으로 불린 이 기이한 친일 행적은 중일전쟁 2년째에 접어든 1939년 초 황해도의 본산 성불사에서 시작되어 1941년 6월까지 3년 동안 전후 여섯 차례나 실행되었다. 실례를 들면 황해도의 대본산 성불사에서는 본·말사 주지와 승려들은 1939년 신년을 맞이하여 부처님 앞에 일본군 전몰장병 영령을 위한 천도제를 지내고, 황군(일본군) 무운장구 기원식을 3일간 봉행하였다. 그리고 각 사찰의 주지와 대중 스님들이 탁발보국대를 조직하여 관내를 순회 탁발하여 모은 총액 179원 92전을 관내 경찰서, 신문사 지국에 전달, 헌납하여 일본군을 위한 국방헌금으로 바쳤다. 그 외 탁발 보국을 한 곳은 함남 흥남포교당에서 1939년 7월 7일 5일 동안 탁발한 31원 35전을 흥남경찰서에 국방헌금으로 내놓았다. 또 부산사원연합회의 탁발보국대(1939년 11월 2일, 67원 15전), 직지사의 탁발보국(1940년 11월, 2백 원), 함북 경원군 월명사(1941년 2월, 50원) 등지에서 탁발로 모금한 돈을 국방헌금으로 바쳤다.
중앙교무원에서는 총독부에서 만든 <황국신민의 서사>를 모든 불교도가 외우도록 하였다. 김태흡 스님이 발간하는 <불교시보>에서는 1938년 1월 1일 자로 발행된 제30호부터 게재하였고, 중앙교무원의 기관지 <불교>에서는 1939년 1월호(제19집)부터 <황국신민의 서사>를 꼬박꼬박 실었다.
1940년은 중일전쟁 4년째이자 일본에 있어선 황기(皇紀) 2천 6백 년이 되는 해였다. 일본은 황기 2600년을 대대적으로 경축하였는데 조선 불교계도 이에 호응하였다. 그래서 기관지 <불교> 제20집(1940년 1월호)의 첫머리에 발행인 김삼도 스님이 우영(宇英)이란 필명으로 ‘황기 1600년을 맞이하여’라는 친일 권두언을 실어 군국 일본제국에 충성을 바쳤다. 내용은 일본식 ‘황도불교(皇道佛敎)’로 일관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 정책을 ‘진제’(眞: 진리의 명제)라고 표현하는 곡학아세의 친일 곡필을 하기도 하였다.
황기 2600년에 즈음하여 대은(김태흡) 스님이 발간하는 당시 불교계의 유일한 신문이었던 <불교시보>도 대대적으로 친일 기사를 1면에 게재했다. 즉 <불교시보> 1940년 1월 1일자 1면에는 일본 천황 부부의 사진과 함께 ‘흥아성업건설의 신춘, 천은 사해팔굉에 보점’이란 제하에 황기 2600년을 맞이하여 일본 천황과 황실의 만수무강과 번영을 기원하며, 아울러 중일전쟁에 승리하여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며 부르짖고 있다. 또 <신동아 건설과 내선일체>란 친일 일색의 연두사까지 실었다.
일본은 국민과 식민지 백성 등에게 일본의 우월함을 강조하여 중일전쟁에 승리하고자 1940년 11월 10일과 11일 도쿄 궁성에서 황기 2600년의 기념식을 거국적으로 개최하였다. 이 행사에는 일본, 조선, 대만 등지의 각계각층의 대표 약5만 여 명이 참석하였는데, 조선 불교계에서는 31본사 주지 중 각 도를 대표하는 9명이 도쿄로 건너가 이 행사에 참석하였다.
총독부의 인가로 1941년 5월 1일, 조선불교 조계종이 출범하였다. 종정은 오대산 상원사의 조실 한암 선사가 추대되었고, 종무총장(지금의 총무원장)은 월정사 주지 이종욱(지암)이 히로다 쇼이꾸(廣田鐘郁)란 창씨명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종정 사서(司書)는 교무원 상임이사 허영호(창씨명 德光允), 재무부장은 통도사 주지 박원찬(창씨명 新井圓讚), 교무부장은 송광사 주지 임석진(창씨명 林原吉), 서무부장은 묘향산 보현사 주지 김법룡(창씨명 香川法龍)이 취임하였다. 종무총장 히로다 쇼이꾸(이종욱)와 교무, 서무, 재무부장은 <불교> 제31집(1941년 12월 1일)에 취임사를 발표하고 집무를 시작하였다. <불교> 제31집의 서두는 조선불교 조계종의 출범에 따른 이들의 사진과 함께 친일 권두언과 취임사로 장식하였다. 이들은 자축 권두언에서 ‘재출발’과 ‘신체제’를 부르짖었다. 이들이 말하는 재출발은 ‘친일불교로서의 재출발’이었고 신체제는 일본의 결전체제에 적극 호응하는 ‘총후보국체제로서의 신체제’였다.
조선불교 조계종이 출범한 그해(1941년) 12월 8일, 일본은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을 도발하였다. 이에 조계종 종무총장 이종욱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바로 그날, 소식을 듣자마자 전 조선 1천 5백여 개의 사찰에 12월 15일부터 태평양전쟁 연전연승을 위하여 기도 법회를 열어서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기도드리라는 통첩을 발하였다. 조선불교 조계종의 총본사 태고사(지금의 조계사)에서는 솔선수범하여 12월 23일부터 황군(일본군) 전승 기도회를 열어 승려와 신도 2백여 명이 궁성요배 등 친일 의례를 시작으로 기도 법회를 하였다. 그리고 조선불교 조계종은 <불교> 제32집의 신년호(1942년 1월 1일)에 “신년을 맞이하는 전시의 각오”라는 제목의 친일 시사문을 게재하여 불교도들에게 ‘전시의 각오’를 다지도록 독려했다.
한편 조선불교 조계종은 두 번째 종회인 1941년 11월 17일 일본군에 군용기 한 대를 헌납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전국 사찰의 스님과 신도들에게 헌납기금 5만 3천 원을 각 본·말사별로 할당하여 징수하였다. 이렇게 거의 강제적으로 모금한 5만 원은 비행기 대금으로, 3천 원은 국방헌금으로 일본 군부에 헌납하였다. 헌납식은 1942년 1월 31일 거행하였다. 이날 일본군의 특별 배려로 ‘조선불교호’로 명명된 구칠식(九七式) 전투기 1대를 용산의 일본군사령부에서 종무총장 이종욱 등 조선 승려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헌납식을 봉행했다. 불교계의 비행기 헌납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묘향산 보현사와 통도사, 그리고 경남 각 사찰에서 각각 비행기 한 대씩을 헌납하였고, 조선불교 조계종에서 2차로 비행기 한 대를 헌납하였다. 이로써 조선 불교계에서는 태평양전쟁 기간 모두 군용기 5대를 일본에 헌납하였다. 보현사, 통도사 등에서 헌납한 비행기 대금은 8만 원씩이었는데 이 금액은 당시 쌀값으로 환산하면 쌀 4천 5백 가마니값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면서 종래의 전시체제를 한층 강화하고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이하 총력연맹)으로 재출발시켰다. 총력연맹은 1941년 12월 8일 일본 천황이 미·영에 선전포고한 것을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이라 하여 떠받들었고, 종교계에는 태평양전쟁 필승을 기원하는 기도회를 봉행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불교계에서는 매월 8일, 전국 각 사암에서 ‘대동아전쟁필승기원법요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조선불교 조계종은 총력연맹의 전시체제에 협력하여 황민 정신의 앙양, 징병·학병의 독려와 후원, 증산, 국방헌금과 공출, 군인 원호 등 총후 총력 운동을 전개하였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의 전시체제에서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승려들은 중앙교무원과 조선불교 조계종의 간부 스님들과 31본사의 주지들이었다. 이런 연유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승려들도 중앙교무원과 조선불교 조계종의 주요 임원들과 1937년 7월 중일전쟁 이후 본사 주지로 재직한 스님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친일 활동을 한 권상로와 김동화 스님, 그리고 기관지 <불교>를 친일 성향으로 편집한 김삼도와 장도환, <불교시보>를 친일 신문으로 발간한 김태흡 스님, 복지황군위문사였던 이동석, 박윤진, 최영환(최범술) 등의 친일 행적도 두드러지게 많았다.
중일전쟁 이후 불교계의 최고 친일 거두로는 이종욱(지암) 스님을 첫손가락에 꼽고, 조선불교 조계종의 서무부장 김법룡, 재무부장 박원찬, 교무부장 임석진(기산) 스님의 친일 행적도 많은 편이다. 그리고 일제 초·중기의 승려로는 이회광과 강대련 스님이 친일 행적을 많이 남겼다. 이들 중 두 승려의 친일 행적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이종욱(1884-1969)은 월정사 재직 승려로 3·1운동 때는 이탁(李鐸) 등과 함께 ‘27결사대’의 일원으로 매국 역적을 제거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한성임시정부에 불교계 대표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어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의 의원(강원도 대표)이 되었으며 청년외교단과 애국부인회에 관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런데 이종욱은 1923년부터 월정사 부채 정리에 공을 세워 월정사 주지가 되었고, 중앙교무원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는 총본산건설위원회의 31본산 주지 대표가 되어 조선불교 조계종의 총본산 태고사를 건립하고, 종무총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종욱은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친일로 전향하여 본격적으로 친일하였다. 그는 월정사 부채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총독부를 수시로 드나들면서 차츰 친일 성향을 드러냈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에는 항일 투사에서 친일 거두로 변신하였다.
이종욱이 남긴 친일 행적으로는 11편의 친일 시사문이 <불교>지와 <불교시보>에 게재되었고, 조선임전부국단·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의 친일 단체에 불교계 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는 국방헌금, 군용기 헌납, 일본식 성명 강요(‘창씨개명’), 일본군 위문 등에 앞장섰고, 일제의 조선인 징병제 시행과 학병 권유에도 적극 협조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 사찰의 ‘범종 및 기타 금속류 공출’에도 적극 나서 일본군의 무기 제조에 필요한 범종, 바라, 경종, 촛대, 향로, 다기 등 절 안의 모든 금속을 일본 군부에 공출·헌납하는데 앞장섰다.
불가사의한 것은 변절한 친일파였던 이종욱이 광복 후인 1977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인 ‘국민장’을 서훈받고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는 사실이다. 최근 이종욱 등 ‘선항일 후친일’의 인사 19명의 건국훈장이 취소되긴 했으나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의 서훈 심사에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권상로(1879-1965)는 문경 김용사 출신의 승려로 <조선불교월보>와 <불교>지(1924.7-1933.8)의 편집 겸 발행인이었고,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수였으며 해방 후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최고의 문필가이자 뛰어난 학승이었다. 그러나 그는 중일전쟁 이후 친일 시국 강연의 주요 강사로서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력할 것을 부르짖었고, 승려들에게도 일본군에 지원할 것을 권유하였다. 권상로는 국민총력조선연맹에 참사라는 직함의 간부가 되어 많은 친일 강연을 하였고, 또한 광적인 친일 논설을 많이 집필하여 발표하였다. 권상로의 친일불교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단행본으로 일본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찬양한 『임전(臨戰의 조선불교』(만상회, 1943년)를 간행한 일일 것이다. 일본에 충성할 것을 주창한 이 책자는 그의 많은 친일 시사문과 함께 근래에 발간된 그의 방대한 유고집 『외경당전서』 전 10권 속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는 이처럼 많은 친일을 저질렀음에도 단 한 번의 참회도 없이 광복 후 동국대학교의 총장이 되고,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으며(1962년), 불교 승려로서 진실한 포살과 자자(불교식 참회 의식)도 없이 1965년 입적하였다.
이상으로 식민지 시대 불교계의 친일 행적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일제의 식민지 기간에 우리나라 불교계는 불교도와 민족에게 숱한 친일 악업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식민지 시대 한국 불교사는 암울하였고, 해방 후에도 그때 배출된 대처승들로 인하여 1954년 이래 비구승들의 정화 운동으로 많은 분규를 겪었다. 이제 한국불교는 식민지 시대의 친일불교를 청산하고 중흥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조국과 민족에게 참회의 삼천 배를 올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새 출발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