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부역 서사

 

2019.2.21. 한겨레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한국 천주교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과거사를 참회하고 사과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20일 발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담화를 통해 백 년 전에 많은 종교인이 독립운동에 나선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라며 그러나 그 역사의 현장에서 천주교회가 제구실을 다 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라고 밝혔다.

 김 대주교는 한국천주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저버린 잘못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찰하며 반성한다라고 말했다.

 

한국 천주교가 일제강점기의 천주교 잘못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공개적으로 사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천주교는 2000쇄신과 화해라는 과거사 반성문을 발표했지만, 포괄적인 형식을 취했다.

 천주교는 1919년 당시 3·1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민족대표 33명은 천도교(15), 기독교(16), 불교(2) 인사들만으로 구성됐다.

 

김 대주교는 외국 선교사들로 이뤄진 한국 천주교 지도부는 일제의 강제 병합에 따른 민족의 고통과 아픔에도,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교분리 정책을 내세워 해방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외면한 채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했다라며 나중에는 신자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할 것과 신사참배를 권고하기까지 했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와 함께 당시 교회 지도자들의 침묵과 제재에도, 개인의 양심과 정의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천주교인들도 기억하고자 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그러나 이는 한국천주교회의 지난 잘못을 덮으려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과 좌절에도 쓰러지지 않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던 그들을 본받고 따르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김 대주교는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그는 우리는 3·1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서로의 다름이 차별과 배척이 아닌 대화의 출발점이 되는 세상, 전쟁의 부재를 넘어 진정한 참회와 용서로써 화해를 이루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천주교회는 과거를 반성하고 신앙의 선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어, 한반도에 참 평화를 이루고, 더 나아가 아시아와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담화가 침묵하는 개신교와 비교되면서 긍정적 평가를 받는 모양이다. 내 생각은 다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대내외적으로 한국 천주교를 대표한다고 하지만 원칙적으로 각 교구는 독립 단체다. 친일인명사전이 발표한 천주교 친일 인사, 특히 노기남 대주교 부분에 이의를 제기했던 서울대교구가 기존 태도를 바꿨을까? 아는 바 없다. 이 문제는 중요하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기독교인 가운데 천주교인이 상대적으로 적은 -개신교 56, 천주교 7- 이유가 조직 특성상 천주교 부역은 교단 차원에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조직 뒤에 개인이 은폐되는 이중성을 지녔다는 뜻이다. 부역 이중구조가 참회와 사과에도 관철되는 한 가치는 공동화한다. 이런 식으로 참회, 사과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잘못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포괄적이다. 포괄적 언어로 공유할 실체적 진실이 과연 있을까. 정말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인 시인 김유철이 <기독교사상(2011-8)>에 게재했던 글(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2011.8.16.<친일, 천주교는 천주교식대로>라는 제목으로 전재) 전문을 인용한다.

 

아픈 가슴을 다시 열며

 

잊을만하면 돌아오는 일들, 잊을만하면 돌아오는 말들, 잊을만하면 돌아오는 장면들이 있다. 한 개인의 삶 속에서도 그런 기억들이 구석구석 묻혀있는 것처럼 집단은 집단대로 그런 기억이 존재하는 법이다. 더욱이 그것이 잊고 싶을 만큼이나 저리도록 욕되고 창피한 기억이라면 그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그런 기억을 자기 스스로 망각할 뿐 아니라 후손들에게 망각을 강요하고 심지어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인을 넘어 탈색, 변색, 위장, 변장, 전도, 허위, 외면의 방법을 통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몰염치한 일들은 모두를 우울하게 한다. 그것도 하느님아버지로 부르는 집단과 사람들이 말이다. 격랑과 같은 삶을 살기에 누구나 잘못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기에 우리를 신이 아닌 허물 많은 사람이라 부르지 않는가?

 

예수가 살아생전 바위라 부르던 베드로마저 주님을 모른다고 도망친 못난 제자였지 않았는가? 우리 주 예수의 죽음을 죽음이라 부르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친히 살려주셨다고 부활이라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첫째 믿음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한국천주교회는 일제강점기 시절 죽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었다. 그렇게 하면 천주교회의 싹이 없어질 줄 알고 역사의 대목마다 좌고우면한 숱한 일들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임이 틀림없다. 십자가를 통한 죽음이 부활로 가는 길이라는 것은 교리 책과 기도문과 미사전례문 안에서만 맴돌 뿐 그 스스로 십자가도, 의로운 죽음도 없이 그저 신분을 보장받는 현실 안주에만 급급했을 뿐 부활에 대한 믿음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민족의 해방절을 맞으며 한국천주교회의 원죄와도 같은 친일의 역사를 부끄럽지만 함께 열어보고자 한다. ‘극소수의 사람들이라고 애써 포장하지만, 한국천주교회는 일제강점기 시절 참으로 욕된 일을 민족 앞에 했었다. 지금이라도 그것이 민족에게 욕을 보인 것이고 주님이 걸었던 십자가 길에서 멀리 떨어진 행동이었음을 해마다 고백하고 가슴을 찢어야 할 일인 것이다. 마침표는 긋는 것이 아니라 찍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할 몇 가지 장면들

 

최초의 한국인 주교 岡本鐵治. 岡本鐵治는 노기남 주교의 창시개명한 일본식 이름이다.

 

194213일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장이며 명동성당 보좌신부인 오카모토(노기남)신부가 경성교구장(현 서울대교구장)이 된다. 그는 같은 해 1114일 최초의 한국인 주교로 임명된 이후 그는 1967년 은퇴할 때까지 25년간의 주교직을 수행한다.

 

다음은 그가 경성교구장에 취임하며 한 말 일부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열심한 가톨릭자가 되고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 대개 열심한 신자요, 충량한 국민은 자기 책임 수행에 심혈을 기울이며 그 책임이 중대한 것이면 자기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희생한다. 현금 국가의 시국은 그런 국민을 요구하고, 현금 교회의 정세는 이런 신자를 요구한다. 우리 모든 이가 열심한 가톨릭자로서 국가에 대한 책임에 이런 태도로써 나선다면 이보다 더 나은 종교 보국은 있을 수 없다. 우리 모든 이가 정성으로써 교회 유지와 발전에 임한다면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은 있을 리 없다.

 

위에 말한 두 가지 커다란 책임을 실행함에 있어 본직은 별다른 새로운 실천 사항을 지시치 않는다. 다만 무언 복종과 일치협력, 이 두 가지를 극력 권장할 뿐이니 이는 실로 유구한 황국 26백여 년 역사가 밟아오고 가톨릭 근 2천 년 연륜을 통일시킨 위대한 원리이다. 국가의 시국을 돌파키 위하여 행정당국에서 지시하는 바는 절대 신뢰하고 무언 복종하라. 누구보다 당국에서 앞뒤 정세와 그에 대하여 국민이 밟아야만 할 길을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비록 약간 어렵고 불편할지라도 공연한 비판이나 한탄을 말고 일치 협력하여 무언 복종하라." (1942118일 경성교구 교구장. 평양춘천교구관리자 바오로 岡本鐵治 <경향잡지> 943, 19422월호, 1942.02.15, 4-5.)

 

<경향잡지>1911년에 창간한 한국천주교회 공식 기관지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잡지이기도 하다.

 

반가웠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조국해방이었을까?

 

19458월 중순부터 9월초 사이에 한국천주교회는 친일파 청산문제에 대해 아무런 공식적이고 권위 있는 입장표명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접적으로나마 이 문제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파악할 수 있는 몇 가지 사건이나 단서를 지적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주목할 사실은 공식적인 침묵이다. 노기남 주교는 1945817일자의 고유문을 통해 신자들에게 경솔한 언어와 행동을 삼가 피하여 극렬 자중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렇다면 일차적인 침묵과 자중의 숨은 의미는 없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강인철, 한국 천주교의 역사사회학,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6, 185)

 

고유문

"교구 내 모든 신직과 교우들에게 강복하노라. 세계의 참담한 전쟁은 그치고 이제 우리 조선에도 새로운 질서가 성립됨에 이르른 현금 시국은 우리 앞길에 중대한 관계를 좌우하는 열쇠를 잡고 있는지라, 그러므로 경솔한 언어와 행동을 삼가 피하여 극렬 자중하는 동시, 새로운 우리의 정당한 정부가 조선 내에 자리를 잡고 모든 정무를 완전 인수할 때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하여 천주 성신의 총광을 비는 뜻으로 매일 기구 드리기를 명하노라. "(1945817일 경성교구 바오로 노주교)

 

194599일에 이르러서야 승전과 해방의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거행되었고 926일 노 주교 집전의 세계평화 회복을 감사하는 장엄미사와 미군 장병 환영식이 명동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강인철, 앞의 책, 186.) 환영식은 애국가 제창, 미국 국가 연주, 노 주교의 미군 환영사, 하지 사령관을 대신한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의 답사, 꽃과 기념품 증정, 조선 독립 만세 삼창, 미군 승전 만세 삼창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111일에는 역시 명동성당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모든 미군의 영혼을 위한 대미사가 노주교 집전으로 거행되었다. (강인철, 앞의 책, 240)

 

그러나 유감스럽지만 노주교가 집전한 희생된 미군의 영혼은 한때 흰 바탕 붉은 해깃발 아래 섬멸되어야 할 적국의 장병에 불과했었다. 한국천주교회는 한 입으로 두말하게 된 연유를 이미 그때 용서를 구하고 민족과 죽어간 적국의 병사들에게 잘못을 고백했어야 했다. 한국천주교회 공식 기관지에 실린 말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다시 보자.

 

"흰 바탕에 붉은 해를 그린 국기는 대일본제국의 표징으로서 그 의장은 간단하나마 심장한 의미가 있고 또 극히 아름다워 모든 나라의 국기를 멀리 초월한다. 이 국기 앞에 충군 애국에 불타는 얼마나 많은 가슴이 뛰놀았으며, 이 국기 앞에 황군 용사의 피는 얼마나 거룩히 흘렀으며, 이 국기 앞에 적국의 함정은 얼마나 많이 바다 속에 격침되고 적국의 비행기는 얼마나 많이 추락되고 적국의 장병은 얼마나 많이 섬멸되었는가!" (<경향잡지> 960, 19437월호, 1943.07.15, 1)

 

새벽의 7이 아닌 7인의 친일 가톨릭인사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는 2008429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할 친일인물 4,800여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그중에 가톨릭 인사로 7명이 포함되었다. 그러자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CBCK)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이 아닌 서울대교구는 단 하루가 지난 430일 성명서를 통해 깊은 유감을 표했으며 가톨릭계 기관지인 <평화신문>(서울대교구), <가톨릭신문>(대구대교구) 들은 2008511일 자 기사와 사설에서 교회의 반성이 아닌 우린 무죄다라고 하소연했다. 심지어 <평화신문>은 친일 명단에 오른 7명의 공로를 부각시키며 물타기에 나섰다.

 

서울대교구는 친일 대상자에 대한 사회의 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룩한발걸음을 계속했다. 학교법인 가톨릭학원(이사장 정진석 추기경)2008611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지은 교원 기숙사 축복식을 통해 건물의 이름을 '노기남관'으로 명명하고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했다. 노기남관의 입구에는 노기남 주교 부조와 문장, 라틴어 사목 모토 피앗 볼룬따스 뚜아’(fiat voluntas tua, 당신 뜻대로 내게 이뤄지소서)를 설치했으며, 1층 현관에도 노기남 주교의 삶과 신앙을 담은 사진 자료들을 게시했다고 교회 언론들은 전했다. 정 추기경은 노기남 주교의 삶과 영성을 오늘날 많은 사제와 신자들이 기억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천주교회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2005년에 발족한 국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73일 관련법에 의거 노기남 주교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는 통지서를 서울대교구에 보내왔다. 그럼에도 서울대교구는 이의 제기 공문을 통해 "위원회 결정은 형식적 조건에만 일방적으로 치우치는 바람에 형식보다 중요한 실질적 내용, 즉 일제 협력 행위에 나서게 된 현실적 동기, 행위 주체에 대한 정체성, 행위의 상대적 정도 등을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고 노기남 주교의 친일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천주교회는 천주교회식대로 산다?

 

서울대교구 산하의 한국교회사연구소는 201010월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노기남 대주교와 한국천주교회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진행했다. 학술 심포지엄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속에서 진행됐다고 교회 언론은 전했지만 결론은 당연히 우리는 무죄다였으며 역사 해석에는 절제와 조심성이 있어야 하며 당시 실상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준엄한 충고로서 결론 삼았다. 아무튼 노기남 주교를 비롯한 가톨릭 인사 7인은 무죄였으며 그들을 친일 대상자로 지목한 사람들이 무고죄와 함께 절제와 조심성이 없는 불균형한 시각을 지닌 자들로서 유죄가 된 셈이다.

 

서울대교구가 발행하는 <평화신문>2011년 들어 새로운 기획물로 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을 연재하고 있다. 그러나 공교롭고 유감스럽게도 현재까지 시대의 등불로 소개된 인물 중 장면, 오기선, 남상철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사람들이다. 한국천주교회로서는 시대의 등불로 부르고 싶겠지만 민족에게는 손가락질받는 친일자인 것이 천주교회와 천주교인에게는 어떻게 보이고 있는 것일까? 욕됨을 욕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런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천주교회는 천주교회식대로 살겠다고 세상을 외면할 것인가?

 

빙산의 일각이지만 한국천주교회가 피해갈 수 없는 친일 사례들 한국천주교회로서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래의 자료들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1. 일본 정신 발양 주간 실시에 관한 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가입한 우리 교회 단체로서도 전적으로 그 취지에 찬동하고 성의껏 모든 주간행사에 참여하되 경성교구 각 지방 본당 신부는 황실의 안녕과 국위선양을 기원하는 뜻으로 미사성제를 거행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교회가 중심이 되어 모든 행사를 각 지방 형편에 따라 계획하여 실시하되 만일 실시 형편상 교회 단독으로 행키 어려운 경우에는 교우들이 그 군이나 면 연맹에서 하는 여러 행사에 다수 참가하여 국민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를 부탁하노라."(<경향잡지> 894, 19391월호, 1939.01.28, 4)

 

2. 경성교구 애국 행사 성적

 

"국민정신총동원경성교구연맹에서는 황기 26백 년의 기원 가절을 기회로 과거 3년 동안에 행한 각종 애국 행사를 보면 동양의 평화, 황군무운장구, 전몰장병의 위령을 위한 각종 기원성제 29622, 동상 목적을 위한 기도 55452, 국방헌금 362423, 제일선 장병위문금 9324, 병기 헌납 보조금 42239, 제일선에 보내는 위문주머니 691, 시국을 위한 강연회와 좌담회 11592, 출전 장병의 가족 위문 151, 부상 장병 위문 37, 기타의 각종 행사 165회로써 천주교회는 비록 겉으로 떠들어 남의 이목을 끄는 일은 별로 아니할지라도 자기의 당면한 책임은 얼마나 은근하고 충실하게 꾸준히 계속 시행하여 나가는지를 여실히 보이고 있다."(<경향잡지> 920, 19403월호, 1940.03.12, 17)

 

3. 매월 제일주일은 교회 애국일로

 

"우리는 천황폐하와 국가의 혜택을 받을 뿐 아니라 천주교 신자로서도 또한 폐하와 국가의 혜택을 받고 있는 우리들이다. 만일 오늘이라도 폐하와 제국의 현명한 통치가 없었던들 우리가 오늘날 천주교회 신자로서 교회의 모든 본분을 안온하게 지켜가고 있었을지가 의문이다. 애국 주일을 위하여 여러분께 간절히 부탁하는바 현금 국책수행을 위하여 정부당국에서 명하는 일체 행사는 물론이오, 교회 당국으로부터도 교회 행정을 위해서나 시국 극복을 위하여 명하는 행사가 있을 때 불편이 다소 있을지라도 봉사 봉공의 정신을 가지고 솔선하여 모든 행사에 협력해 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애국주일에 무운장구 기원 미사를 거행할 것과 미사 전후하여 애국식을 거행할 것과 미사 중 시국에 관한 강론과 미사 후 신궁 혹은 신사참배를 단체로 할 것 등이다."( <경향잡지> 931, 19412월호, 1941.02.12, 15-17)

 

4. 1전 헌금의 결정

 

"국민총력경성교구연맹에서는 병기를 헌납하기로 하여 모든 교우들이 매월 매인 1전 헌금하기로 되었다 함은 당시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작년 연말에 그 수합된 총액이 1만 원에 달하는 좋은 성적을 보였던바 동 연맹에서는 당국에 병기의 종류에 대하여 문의하였더니 당국에서는 현금 그대로 헌납함이 더욱 좋다 하므로 동 연맹 이사장 노기남 신부는 이를 조선군 사령부에 헌납하여 당국자를 감격시켰다."( <경향잡지> 942, 19421월호, 1942.01.15, 10)

 

5. 총독각하는 반도 민중의 영광

 

"근년 같은 시국에 우리가 남차랑 총독 같은 이를 모셨다는 것은 큰 다행이었다. 그가 시작하고 실시한 반도교육령의 개정, 창씨제도, 지원병제도, 기타 내선일체의 대방침은 착착 실현되고 또 그 실적이 일반의 예상 이상으로 양호하였다. 그리하여 반도 민중이 시험에 합격하여 적자, 완전한 황국신민에 편입된 데에는 남총독 각하의 공적이 자못 큰 바이니 남총독은 실로 반도 민중을 구원한 큰 은인이다."( <경향잡지> 947, 19426월호, 1942.06.15, 1)

 

6. 대망의 징병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정신이니 황국을 위하는 정신과 내선일체의 정신을 더욱 철저하게 가져 실현하기로 힘쓸 것이오, 국어(일본어-인용자 주)를 모르는 청년들은 하루바삐 국어에 달통하도록 힘써 응소된 다음에 여러 가지 불편이 없도록 할 것이며 내지 군인들의 장점을 지금부터라도 배우기를 힘쓸지니 서로 일치단결하는 마음과 자기가 맡은 책임은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수행하고야 마는 그 견고한 책임 관념과 아무리 어렵고 괴로운 일을 당할지라도 실망 낙담 하는 일 없이 꾸준히 끝까지 최후의 한 방울 피까지 갈진히 하려는 백전불굴의 정신 등은 황군이 세계에 자랑하는 바이다. 심신 양 방면으로 이렇게 모든 준비를 다하여 반도 청년들이 군문에 들어가는 날에는 반도 동포도 내지 동포와 추호도 다름없는 완전한 황국신민의 자격을 갖출 것이다."( <경향잡지> 955, 19432월호, 1943.02.15, 1)

 

7. 금속품 헌납

 

"우리가 날마다 애용하던 식기를 헌납하여 이것이 어뢰가 되어 적국의 군함을 격침시키고 우리의 자녀들이 밥을 먹던 수저가 헌납되어 이것이 포탄도 되고 폭탄도 되어 혹은 적국의 비행기를 떨어트리고 혹은 적군의 진지를 괴멸시키고 하는 것은 생각만 하여도 얼마나 통쾌하며 얼마나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자랑스러운 일이 되는가? 이런 쾌감은 그 자체만 보아도 우리가 금속품을 남모르게 감추고 비밀히 애지중지하는 그 애착심에 비하여 훨씬 고상하고 깨끗하고 대장부다운 맛이 있는 것이다."(<경향잡지> 957, 19434월호, 1943.04.15, 1)

 

8. 비행기를 보내자

 

"비행기! 비행기! 현대전쟁에는 무엇보다 비행기가 많아야 한다. “비행기를 한 대라도 어서 빨리 보내라.” 이것은 남태평양 제일선에서 주야의 분별없이 악전고투를 하는 황군용사들이 국민을 향하여 외치는 주문이다. 1선에서 귀화하는 여러 장병들의 보고에 의하면 적군보다 비행기의 수효가 더 많을 필요도 없다. 동등의 수효이기만 하면 적의 항공 병력을 분쇄시키는 것은 문제도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황군의 분투정신과 민첩 무쌍한 기술을 생각하면 누구나 긍정할 것이다."( <경향잡지> 967, 19442월호, 1944.02.15, 1)

 

"이후 1944211일부터 429일까지 전개된 총력연맹의 미영격멸 비행기 2백 대 헌납운동은 예상보다 훌륭한 성적을 내어 248대분인 24,818,36671전의 헌금이 만들어졌다."( <경향잡지> 970, 19445월호, 1944.05.15, 2)

 

아직도 교회는 할 말이 있는가?

 

필자는 천주교인으로서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특별히 서울대교구는 아직도 할 말이 있는 듯하다. 노기남 주교는 19421220일 주교취임을 한 날 명동 바오로수녀원에서 축하 오찬회가 있었다. 이 오찬회 석상에서 노 주교는 대동아전쟁의 필승을 다짐하고 황국 신민화 운동을 수긍하는 체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노 주교는 즉시 혀를 깨물고 싶도록 후회했다.” (노기남 대주교, 박도원,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228-229)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후회는 친일의 마침표가 아니라 친일의 서막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국천주교회가 자랑하는 첫 한국인 주교는 민족해방과는 상관없는 교회의, 교회에 의한, 교회를 위한 주교였을 뿐이다. 노기남 주교는 그리고 지금도 그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항변하고 있지만 그들이 주님이라고 고백한 예수는 노기남 주교가 그토록 지키려는 교회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에 의해 핍박받던 위안부징용자징병자독립군 등을 비롯한 억눌린 민족 가운데 계셨음을 몰랐던 것이다. 지금도 예수 없는 교회를 붙들고 있는 그대들은 누구인가? 예수의 목소리는 이천 년 전부터 들려오고 있다.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공동번역 요한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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