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공부와 부역 서사 쓰기에 진심인 요즘 이에 부합한 실천으로 숲 정화와 네트워킹 제의를 시행하고 있는데 누군가 신중히 물었다: 선생님, 신비주의자세요?
신비주의 아니면서 신비에 깃드는 이치를 자분자분 말해주었으나 어려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물론 나도 어렵다. 쉽게 자주 대놓고 일어나는 경험이 아니어서 그렇고, 그래서 신비는 실재지만, 살갗에 닿는 설명은커녕 묘사조차 힘들다. 어제저녁 나는 다른 길에서 깨달음과 만났다.
백반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돌아와 한의원 건물 현관문을 열려다가 열쇠 꾸러미를 떨어뜨렸다. 하필 복개 하수로 구멍 속으로 리튬 건전지가 빠져버렸다. 10년이 훨씬 넘은 일이라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 멀지 않는 곳에 사는 간호사를 찾아가 리튬 건전지를 받아왔다. 아무리 해도 열리지 않았다. 비밀번호 찾는 과정에서 이리저리 손댄 탓으로만 여기고 다시 간호사에게 연락했더니 부랴부랴 왔다. 순식간에 문이 열렸다. 간호사가 막 웃는다: 원장님, 이러시기에요?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간호사가 묻는다: 혹시 비닐 팩 속에 있는 채로 터치하시지 않았나요? ‘문·송’ 타성을 지닌 나는 그 질문이 뜻하는 바를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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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 생각에 잠겼다. 비닐 팩 속에 있는 채 리튬 건전지를 터치한 행동과 가죽 커버 속에 있는 교통카드를 터치한 행동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 차이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같으리라 무심코 생각한 ‘문·송’ 나태를 그제야 불현듯 알아차렸다. 전자기로 통합할 수 있다고 해서 전기와 자기가 본성상 똑같은 하나라고 할 수는 없다. 전기와 자기는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不二而不一), 내 용어로 말하면 비대칭 대칭 사건이다. 이 이치를 생각하는 일과 생활하는 일은 다르다. ‘문·송’이 아니라면 범할 수 없는 사소하지만 커다란 실패가 나를 통렬한 반성과 깨침으로 초대했다.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실재를 둘로 분리하면 기계론, 하나로 환원하면 신비주의다. 신비주의 전복했다고 자부하는 기계론이 오류라는 진실은 되돌아 기계론 극복한답시고 신비주의에 빠져드는 오류를 향한 경고다. 기계론과 신비주의 경계에서 피는 꽃, ‘신비 기계’가 참 실재다.
“나는 나고 나무는 나무다. 나는 나만이 아니고 나무는 나무만이 아니다. 나는 나무기도 하며, 나무는 나기도 하다. 나는 나고 나무는 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