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 음악에 비해 미술은 평범한 소시민 삶에서 조금 더 멀리 있다. 노래방은 있지만 그림방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좀 특별한 사연으로 미술과 가까이 있었다.
중학교 때 선명한 기억 하나가 있다. 워낙 가난해 미술 시간 준비물을 제대로 가져가지 못해 곤욕을 치르곤 했다. 어느 날 이름 모를 질 나쁜 큰 종이 몇 장을 사 내 손으로 꿰매서 종이철을 만들었다. 스케치북이랍시고 들고 갔더니 미술 선생님은 그 수제(!) 스케치북을 이리저리 보더니 “여기에다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서 툭 집어던졌다. 가볍게 머리통을 쥐어박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구시렁거리며 지나갔다. 그는 우리를 교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 눈앞에 펼쳐진 도시 변두리 풍경을 수채로 담아내도록 지시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끝날 무렵 돌아와 그림 하나하나를 살폈다. 내내 아무 말도 없이 쓱쓱 지나치던 그가 내 그림 앞에 딱 멈춰 섰다. “어라? 이놈 봐라. 그림을 아네?” 이번에는 좀 다른 몸짓으로 내 머리통을 툭 치며 지나갔다.
고등학교에 진학했어도 미술 시간 풍경은 변함이 없었다. 아무런 의식 없이 우리는 서양식 그림 그리기를 반복해서 배웠다. 이론 수업 또한 그랬다. 딱 한 번인가 사군자를 배웠는데 그중 난을 칠 때 가장 먼저 하는 붓질을 ‘기수제일필’이라 한다는 미술 선생님 음성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가난은 나를 괴롭혔다. 물감을 아끼려고 연필 스케치 자국을 굵게 그대로 둔 위에 살짝, 거의 반투명에 가깝게 색칠한 그림을 본 미술 선생님이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과 똑같은 말을 했다. “어라? 이놈 봐라. 그림을 아네?” 학기 말 우연히 길에서 미술 선생님을 만났는데 인사를 받더니 우정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미술 선생질 20년에 실기 점수 100점 준 건 네가 처음이다.” 별명이 미친×였던 그가 유일하게 남긴 자상한 말이었다.
미술 선생님 두 분이 건넨 말은 무슨 주문이기라도 한 듯 오랫동안 내 삶을 그림 애착으로 이끌었다. 돌이켜보면 그 애착 고갱이에는 근원적 무지가 똬리 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림 이론, 사조에 관한 알량한 지식을 빼면 거의 들이대기식으로 그림 앞에 서곤 했다. 전시회를 무수히 드나들었고 도록과 비평을 수집하다시피 쟁여놓았다. 청전 이상범 전시회를 보고 감상문을 써서 상을 받은 적도 있다. 김병종 전시회는 거의 빠짐없이 갔고, 화가에게 어설픈 비평을 편지로 보내 답글을 받기도 했다. 토마 쿠튀르에 매료돼 한동안 심취하기도 했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본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다. 박수근, 장욱진, 조르주 루오, 클로드 모네, 에곤 쉴레, 몽세라 구디올···내 마음속 거장들이다. 물론 아직도 그림과 그림판은 잘 모른다.
대박 난 유명인은 아니지만 분단 서사로 한국화 그리는 칡뫼 김구가 내 오랜 벗이다. 그에게서 한국 화단 이야기를 듣고서야 더 심각하게 부역 풍경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알수록 참담했다. 대체 예술이란 인간에게 무엇일까.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한국미술 부역 서사 바깥에서 홀로 어정거리며 그림 보던 나는 과연 무엇일까. 서구 미술에 서린 제국 이데올로기, 식민지 미술에 깔린 부역 bullshit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65세 이상 노인 침 치료비로 천 원권 지폐 두 장 받고 백 원권 동전 하나 거슬러주는 한의사 나는 제 얼굴로 퇴계 이황을, 고증 잘못된 충무공 이순신을 그린 두 특권층 부역자 화가와 어떤 경계도 맞대지 않고 있을까. 내가 스스로 부역자임을 인정하는 고백 오지랖은 어디까지일까. 심사가 사뭇 엉클어진다.
하필 미술 이야기만은 아니다. 내 삶 모든 영역은 지울 수 없는 부역 증거들로 얼룩져 있다. 특권층이 아니어서 돈도 명예도 없으니 천행이라 여기며 증언을 계속한다.